이름 없는 사람들
그 아이는 늘 같은 시간에 그 놀이터에 있었다. 햇살이 뉘엿뉘엿 나무 사이로 흘러들어올 즈음, 소란스러운 아이들 틈에서 그 아이는 조금 떨어진 모래밭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소리를 지르고, 장난을 치며 뒤엉킬 때도 그 아이는 말이 없었다. 입술을 앙다문 채, 작은 손으로 모래를 쓸어 담고, 조그만 돌멩이를 하나씩 옮기며, 무언가를 만들듯 아니면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듯 조용히 혼자만의 놀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고 있었지만, 그 세계는 오직 자기 안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처음 본 날부터 이상하리만치 시선이 머물렀다. 이유 없이 마음이 조용해지고, 무언가를 잊고 있던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모르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아이는 마음이 너무 빨리 자라서, 입이 그 감정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반대로, 마음이 너무 느리게 자라서, 말을 꺼내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혹은 말을 꺼내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그는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하지 않았고, 말이 없다고 해서 세상과의 연결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말 없이도 스스로를 감당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은 너무 많으면 감정을 흐리고, 너무 없으면 오해를 낳지만, 그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상태가 오히려 가장 온전한 자기 표현이었다.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운다. 그건 누구에게 배운다기보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간다. "괜찮아야 예쁘다", "웃어야 좋아한다", "잘해야 칭찬받는다"는 말들은 어른의 말 같지만, 아이들은 그 문장을 표정과 반응으로 먼저 익힌다. 그리고 그걸 익히지 못하거나 익히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점점 조용해진다. 말보다 침묵이 더 편해지고, 표현보다 눈빛이 더 정확하다고 믿게 된다. 나는 그 아이가 바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여전히 어리고 작지만, 어른보다 더 조용히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감정을 억지로 꾸미지 않는 사람.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으로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햇빛이 조금 더 따뜻했고, 어떤 날은 손에 인형 하나가 들려 있었다. 때때로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누구의 시선도 없이 그 아이 혼자만 그 놀이터의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말'로만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 반응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 걸까. 어쩌면 가장 진짜 감정은 말이 되기 이전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마음, 표현으로 바뀌기 전에 이미 자라난 감정.
아이의 침묵은 그저 공백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침묵을 감당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의 깊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어른들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혼자였지만, 단 한 번도 허둥대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반응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거리에서 자신만의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 아이는 정말로 잘 견디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그 아이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그는 모래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고, 손에 작은 플라스틱 삽을 들고 있었다. 모양도 의도도 없는 선들이었지만, 그 안엔 이상하리만치 질서가 느껴졌다. 그 질서는 언어가 아닌 마음의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나는 그걸 보며 또 한 번 깨달았다. 표현이란 반드시 말로 해야 하는 게 아니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충분히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와 이미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로는 다다를 수 없는 곳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리듬으로.
아이의 세계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작지 않다. 그리고 그 감정이 말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다. 누군가는 그걸 기다려주고, 누군가는 그걸 놓치고, 또 누군가는 그걸 기억한다. 나는 그 아이를 기억할 것이다.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었던, 아무 말도 없었지만 가장 진심에 가까웠던 그 하루를.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 그런 아이였던 순간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