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하루, 도서관 구석의 청년

이름 없는 사람들

by 찌니


그 청년은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서관 3층 구석, 창가로 빛이 조용히 스며드는 자리. 오래된 나무 책상이 놓여 있고, 삐걱이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그곳은, 마치 그 청년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된 자리처럼 보였다. 그는 거기서 책을 펼치고, 연필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무언가를 적거나 읽는 척했다. 겉으로 보기엔 분주한 공부의 시간 같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가 사실은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한다. 그 청년도 그랬다. 책장을 넘기지 않고, 연필을 움직이지 않으며 앉아 있는 시간은 오히려 가장 분주해 보였다. 무언가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때로는 무거운 감정을 묵묵히 견디고, 때로는 가라앉은 마음을 스스로 꺼내려 애쓰는 눈빛이었다. 말은 없고, 표정도 별로 없었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들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책상 위에 귤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새로운 노트를 꺼내들었고, 노트 한 귀퉁이에 작은 점 하나를 찍고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행동처럼 보였지만, 나에겐 하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조용한 자리에서 그는 조금씩 자기 안의 어둠을 걷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침묵의 시기를 겪는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말보다는 숨을 고르며 살아가는 날들. 하지만 침묵은 항상 슬픔만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다시 말하려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여백이고, 다시 걷기 위한 준비가 될 수도 있다. 그 청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마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었던 사람.

그의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무엇을 읽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읽고 있었고, 또 자신을 다시 써내려가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억지로 뛰지도 않고, 그저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조용했지만 희망적이었다.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말하지 않았을 뿐인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의 구석은 여전히 고요했고,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아주 작지만 분명한 빛이 스쳤다. 겨울 끝자락의 햇살처럼, 어딘가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빛. 나는 그 빛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시작은 꼭 거창한 결심이나 변화가 아니라, 조용히, 아주 작게,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청년은 이름도, 배경도, 말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던 사람.
그의 하루는 아주 작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용기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그건 멈춘 하루가 아니라, 견디고 나아가는 하루였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런 하루를, 그런 시기를, 한 번쯤은 통과해 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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