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하루, 조용히 웃는 남자

이름 없는 사람들

by 찌니


그 남자를 처음 본 건 계절이 어디로 흐르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무심한 하루였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 끝의 작은 카페, 그곳 창가 자리에 그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책을 펼치고 있었지만 시선을 거기 두고 있진 않았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같았지만 무언가를 응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작게, 정말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어떤 상황에 반응한 것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그의 안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다 조용히 떠오른 감정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그 웃음이 감추고 싶은 무언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그 얼굴을 마음속에서 다시 그려보다가 나는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는, 웃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혼자가 되는 법을 삶의 중간쯤에 배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혼자일 때마다 그 과정을 떠올리며 익숙해지는 연습을 한다. 혼자라는 건 단순히 곁에 사람이 없다는 상태가 아니라, 함께였던 시간의 온기를 아직 몸에 남긴 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도 보였고, 이미 오래전에 떠나보낸 사람을 마음속에 앉혀두고 있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또렷하게 다가온 것은, 그는 혼자임에도 완전히 고립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감정의 밀도가 만든 연결이 있다면 그는 지금도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손끝이 닿지 않아도, 어떤 기억은 그렇게 사람 곁을 오래 머문다.

그를 보며 나는 한동안 머릿속에서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관계는 정말, 함께 있어야만 유효한 것일까? 이미 곁을 떠난 사람과의 관계는 과거로만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품고 살아가는 방식에도 저마다의 현재형이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흔히 ‘잊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삶은 그렇게 직선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감정은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방식으로만 소화될 수 있다. 그는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와서 책을 넘기고, 커피를 식히고,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습관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나에겐 하나의 예의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끝낼 수 없는 관계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나는 그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그가 누구를 떠올리는지, 무엇을 마음속에서 반복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감정은, 말보다 표정으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조용히 미소 짓는 그 얼굴은 누군가를 끝까지 애도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였고, 동시에 누군가를 여전히 살아 있게 품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떠난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하루를 꾸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잊는 것을 회복이라고 여기지만, 그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선택한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진짜 성숙함은 감정을 정리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감정을 잘 두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반드시 소리로 남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지 않고, 다정했던 말들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조용히 되뇌는 것으로도 그 감정은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랑을 지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은 대개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희미해지지만, 아주 가끔,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이 오히려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그는 어쩌면 그 ‘가끔’에 속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이상하게도 오래 머물게 했다.

그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작은 컵 속에 남은 커피는 식어 있었고, 책장은 몇 페이지쯤 넘겨졌지만 눈길은 여전히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조용히 웃었고, 나는 멀리서 그 조용함을 지켜보았다. 그 자리는 아주 특별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담긴 하루는 분명 특별했다. 누구도 알아보지 않을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을,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이름 없는 사람의 하루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도 조용히 머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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