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늘 조용히 시작된다

시간의 결을 따라, 마음의 방향으로

by 찌니


처음이라는 말에는 늘 거창한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인생을 바꿀 만큼 인상적인 사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분명한 계기, 스스로도 확신할 수 있는 강한 결심 같은 것들. 우리는 시작이란 대개 그렇게 분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진짜 변화가 시작된 것 같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자격을 얻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을 때마다 아직은 아니라고, 좀 더 완벽해지면, 좀 더 준비되면 그때 하자며 스스로를 뒤로 미룬다. 하지만 삶을 돌아보면, 진짜 중요한 시작들은 대부분 그렇게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너무 평범해서, 그것이 시작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순간들은 늘 일상 속에 숨어 있었다.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아 생각을 바꾸기도 했고, 아무 기대 없이 펼친 책 한 권이 나를 전혀 다른 질문 앞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결심이나 선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변화가 바로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결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었을 뿐이다. 시작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안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종종 시작을 결과와 혼동한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야 비로소 시작한 것처럼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여긴다. 하지만 시작은 결과의 반대편에 있다. 시작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서툴고, 확신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작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무시해버린다.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직 달라진 게 없다는 이유로. 하지만 변화란 애초에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변화는 늘 ‘조금 달라진 마음’에서 시작되고, 그 마음이 충분히 오래 머물렀을 때 비로소 삶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처음이 조용하다는 건, 어쩌면 그 시작이 우리에게 오래 남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크게 요동치지 않기에 쉽게 꺼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기에 남과 비교하지 않게 된다. 조용한 시작은 나만의 속도로 자라난다. 그래서 그 시작을 알아차리는 것도, 지켜내는 것도 오롯이 나의 몫이다. 누군가의 축하나 인정이 없더라도, 스스로 ‘이건 분명 나의 변화다’라고 믿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시작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조용한 움직임을 내가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이제 시작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분명한 각오가 서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았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빠르게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으면 스스로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삶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미세한 감정의 변화, 예전 같으면 넘겼을 생각 하나, 나를 향한 시선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작은 대개 소리 없이 찾아온다는 것도.

그래서 새해라는 시간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새해가 특별해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서 시작된 것들을 조금 더 믿어보기 좋은 시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않아도 괜찮고, 모든 걸 새로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기미를 무시하지 않는 것, 그 작은 움직임을 알아보고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처음은 늘 조용히 시작된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 조용함 덕분에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해도,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끼지 못해도, 그 시작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시작을 끝까지 살아내는 사람만이, 어느 순간 뒤돌아보며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시작이었다고. 인생은 늘 그런 식으로,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순간들 위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