暗雲低迷 : ‘비가 올 듯한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다.’는 뜻으로,
위험한 일이나 중대 사건 따위, 좋지 않은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정세를 이르는 말
*
며칠간 이어진 비가 잠시 멈추고 햇살이 들었다. 염온은 그 틈을 타 그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종이를 들어 올리자, 수묵의 빛이 흐르는 그림들이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손을 움직이면서 그녀의 생각이 자연히 낙리에게로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단정한 사람이었지만, 늘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태도였다.
드러날 듯 말 듯 했던 눈빛 뒤의 짙은 어둠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염온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데 어느 날……그들을……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끝의 침묵.
그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명하다. ‘그들’은 낙리의 과거를 짓누르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고도 깊어서, 오래 묻어두었던 상처가 입을 벌린 것 같았다.
“생각보다……위험한 분이셨군요.”
염온은 거의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혼담을 물려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듯한데, 묘하게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비 출신이었음을 들었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그가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달라질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깨닫자 염온은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며 탄식하였다.
지금의 감정이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고, 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염온은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얼어붙은 겨울 강변의 풍경.
‘이 그림은……마음을 담으셨군요. 그래서인지, 보고 있으면 추운 풍경인데도……이상하게, 따뜻합니다.’
낙리가 이 그림을 보며 평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뒤 이어 했던 말도,
‘저는……가끔, 가족들 얼굴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손재주가 있었다면……그 얼굴을 그림으로라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에 대해……나는 너무 모르는 게 많았구나.”
염온은 종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때, 마루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염석부부인 듯했다.
염온은 그림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저잣거리에선 온통 그 이야기뿐이라니까요!”
염석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승상의 둘째 아들이 큰 아들을 죽…….”
“여보!”
올케의 날카로운 제지 소리.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벽에도 귀가 있다잖아요.”
“집 안인데 뭐…….”
“그래도요!”
“하여튼, 승상가는 정말 무서운 곳이에요. 내가 거길 그만두기 정말 잘한 거라니까요.”
염온은 쓴웃음을 흘렸다.
‘넌 잘린 거고…….’
올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낙 선생은 운이 없네요. 기껏 식객으로 들어갔는데, 안에서 자꾸 험한 일만 생기니 말이에요.”
“결국 원흉은 둘째 공자겠죠.”
‘원흉……,’
그 단어가 이상하게 걸려서 염온은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곱씹었다.
염온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 또한 이어지며 낙리가 해준 이야기가 잇달아 되살아났다.
노비였던 그의 가족은, 주인의 죄 때문에 모두 죽었다고 했다.
‘죄인의 가족이 연좌되는 일은……있지.’
그렇지만 현 황제의 즉위 이후 그런 대규모 사건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게다가 집안의 노비까지 죽이는 일이 흔했을까?
염온은 승상 부인의 초상화를 그릴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상공이 폐주 앞에서 실언을 하여 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나는 도망간 남편을 대신하여 감옥에 갇혔다. 그나마 다행이었나. 죽임당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런 일은 폭군이 나라를 뒤흔들던, 말 한마디에 목숨을 잃던 시대에나 있었을 일이다.
폭군은 반정으로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은 지 십여 년이 지났건만, 폐주(廢主)가 저지른 잔혹한 일들은 아직도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낮게, 길게 회자되고 있었다.
그렇다면……낙리는 그 무서운 시절에, 아주 어릴 때 가족을 잃었던 걸까.
그 생각이 닿자, 염온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연민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천천히 가슴에 스며들었다.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염온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발인이 끝났다. 승상저는 여전히 상중이었으나, 집안은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낙리는 밤마다 잠을 설쳤지만, 낮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였다.
오늘도 영유의 숙제를 들고 글 선생을 찾아갔다.
“도련님의 숙제를 가져왔습니다.”
글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이걸 봐야 할까 말까.”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도무지 성의가 보이지 않는구나. 획마다 힘이 빠져 있으니, 이는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다는 증거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붓을 잡는 것인지…….”
낙리가 변명했다.
“승상가에 요즘 일이 많아서 도련님께서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그런 게 아니야.”
선생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흘렸다.
“원래부터 이러했지. 자네를 포함해서 막내 공자 주위 사람들 모두 공부에 도움 될 생각이 없지 않나. 이제 지학(志學)이 다 되어가는 막내 공자를 아이 취급하며 어리광만 받아주니 이런 게야.”
낙리는 그 말에 동의했다. 영유가 공부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오늘따라 이렇게 날카로우신가.
잠시 침묵하다가 선생이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나 대신 다른 선생이 올 걸세.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 이런 느슨한 분위기가 통할 거라 생각지 말게.”
“예? 선생님께서……바뀌신다고요?”
낙리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승상께서 막내 공자의 공부에 갑자기 신경을 쓰기 시작하셨어.”
글 선생이 가볍게 노기를 비치며 말했다.
“작은 아들이 그 모양이니, 내버려 두었던 막내 아들에게 뒤늦게 신경 쓰시는 모양이야.”
낙리의 손이 굳었다.
“막내 공자가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왜 전부 내 책임인지 모르겠군.”
낙리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선생님, 이런 말씀은……혹시라도 누가 들으면…….”
그러자 선생은 고개를 젖히며 헛웃음을 흘렸다.
“자네가 이 집안에 들어왔을 때는 사고도 있고 해서 승상께서 막내 아들에게 조금 신경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전에는 완전히 무관심하셨어. 미워하시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선생은 한동안 화가 난 기색을 보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속이 상해서 자네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군. 미안하네. 이제부터라도 막내 공자의 학업에 신경 쓰게. 이제는 승상께서 막내 아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실 테니, 그래야 아랫사람들도 경치지 않을 거야.”
낙리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도련님을 위해 애써주신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떠나신다니 참 아쉽습니다.”
*
낙리는 영유의 방으로 돌아왔다.
“선생님께 숙제를 전달드렸습니다.”
“또 잔소리만 하셨지?”
영유가 장난스럽게 반응했다.
낙리는 순간 글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굳이 전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도련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좀 피곤할 뿐이야. 괜찮아.”
그러다가 영유는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리야. 내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
낙리는 깜짝 놀랐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고, 무엇보다 상중(喪中)에 혼사를 논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도련님, 그게 무슨……?”
“아, 정식으로 정해진 건 아니야. 상중이니까 그럴 수도 없고.”
영유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냥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을 귀띔으로 전달받았어.”
“어떤……집안이십니까?”
낙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銀)씨 가문이래.”
‘귀족이잖아?’
그 집안이라면 낙리도 들어본 적 있는 명문가이다.
“아직 큰 형님 상중인데……. 왜 이런 이야기가 들어왔을까?”
낙리는 일순 침묵했다.
글 선생이 바뀌고, 승상이 영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 혼담까지.
‘차남을 포기하는 것인가.’
“이상한 일이네요.”
낙리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낙리는 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붓을 들었다.
승상가의 변화를 적었다. 글 선생, 혼담,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붓이 멈췄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덧붙였다.
승상가에서 나가고 싶다고.
쓰고 나서도 한참을 바라보다가, 붓을 거두었다.
서신을 은밀히 내보냈다. 익숙한 절차였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마음이 무거웠다.
편지를 부치고 돌아선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소 태사가 허락할 리 없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은씨 가문의 정보와 승상이 차남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분석이 적혀 있었다.
낙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예상한 대로였다.
몇 가지 지시가 이어졌다.
마지막 문장에 시선이 멈췄다.
『자네의 상황은 알겠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머물게. 자네가 바라는 것도……곧 이루어질 것이네.』
낙리는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거절은 단호했다.
‘내가 원하는 것…….’
낙리는 편지를 태우며 허탈하게 웃었다.
*
어느 날, 낙리는 영유에게 혼사에 대해 물었다.
“도련님, 그 이야기는……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유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아가씨가 재색겸비라는 소문이 있더라.”
“……그렇습니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다행이지.”
영유가 환하게 웃었다.
낙리는 미소로 답했다.
그러나 마음은 무거웠다.
낙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혼사라…….’
염온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이었던가.
낙리는 고개를 저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