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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막 그친 산사(山寺)는 흙냄새와 물비린내로 눅눅했다.
오래된 사찰의 작은 선방(禪房). 벽은 비어 있고, 돌바닥은 차가웠다.
낙리는 조용한 방 안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방문이 삐걱 열리며 잿빛 옷자락이 보였다.
소 태사였다.
“이 나이에 산을 오르려니…….”
노인은 숨을 고르며 미소 지었다.
“숨이 차군. 비가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지.”
낙리는 급히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법당엔 들렀는가?”
낙리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못 했습니다.”
“그래. 아직은 어려울 것이야.”
소 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낙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제는……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은 얼굴이야.”
소 태사는 부드럽게 웃었으나 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네. 세상일에서 옳고 그름이 어찌 그렇게 분명하겠나.”
침묵이 흘렀다. 창호 밖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낙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태사공께서……저 같은 미천한 자를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 태사는 빙그레 웃었다.
“예전에 말했지 않나. 나는 자네를 제자처럼 여기고 있어.”
낙리는 소 태사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소 태사는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요히 말을 이었다.
“나는 승상처럼 사병을 거느리지도, 식객으로 뜰을 채우지도 않았네. 내 곁에는 자네처럼 믿을 만한 이가 몇 안 되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게다가……. 승상가의 안쪽에 자네처럼 오래 머문 사람은 없네.”
낙리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소 태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힘들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의 눈길이 창문 너머로 향했다. 멀리 산허리엔 여전히 안개가 끼어 있었다.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원희.”
소 태사가 낙리의 자(字)를 불렀다.
“이번 일은 필요했어.”
낙리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소 태사는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
그 무렵, 승상저는 분주했다.
정원의 돌길 위로 사람들이 오갔다. 오늘은 영유의 거처에 새로운 식객들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이쪽이야.”
영유는 두 명의 청년을 이끌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 중간의 방 앞에 멈춰 선 영유는, 문고리에 손을 얹고 망설임 없이 열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리야?”
대답이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늘 그렇듯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지필묵(紙筆墨)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책들은 크기별로 가지런히 쌓여 있었으며, 서랍장 위의 옷가지도 구김 없이 개어져 있었다.
영유의 시선이 벽의 족자에 머물렀다.
붉은 동백나무 그림. 방안의 유일한 장식이었다.
영유는 밖으로 나와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세웠다.
“리는 어디 갔느냐?”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아는 분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돌아온다고 했어?”
“따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저녁 전에는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영유는 하인을 보내고 두 청년을 돌아보았다.
“그 사람이 돌아오면 너희를 소개해 주마. 그 사람이 너희 선배다. 아주 성실한 사람이야.”
“알겠습니다, 도련님.”
두 청년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영유가 정원으로 걸어 나오려는 순간,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이마에 떨어졌다. 이어 두 방울, 세 방울.
빗소리가 정원의 나뭇잎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영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산 너머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들어가자. 오늘은 또 한바탕 쏟아지겠구나.”
영유의 말에 두 청년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처마에서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종소리가 멈추었다. 빈자리로 빗소리가 스며들었다.
“자네는 지금 세상이 평온해 보이나?”
소 태사의 음성은 마치 주문(呪文)과 같이 단조로웠다.
“10여 년 전, 금상(今上)을 옹립하였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바로 선 건 아니었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폭군이 쫓겨나고 그 권력은 황실이 아닌 공신들의 손에 들어갔지. 반정(反正)의 공신들은 저마다의 공을 자랑하며 벼슬을 나눠 가졌고 나라를 구했다는 명목 아래, 정사를 제 마음대로 주물렀네.”
노인의 얼굴이 빛을 잃은 나무껍질처럼 서서히 굳어갔다.
“그중에서도 영 대인(大人)이 가장 욕심이 많았네. 과거의 동료들을 하나씩 밀어내고, 이제는 혼자 조정을 거느리고 있지. 다른 공신들이 다 어디 갔는지 아는가? 삭탈관직, 유배, 낙향……. 영 대인이 다 그렇게 만들었어.”
낙리는 무릎을 꿇은 채, 소 태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나마 이 늙은이는, 황상께서 사가(私家)에 계실 적부터 사제지간이었다는 인연이 있었기에 이름뿐인 자리로 밀려나는 선에서 그쳤지.”
소 태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더라도,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황실의 권위가 바로 선다면 무슨 상관이었겠나.”
소 태사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승상에 대한 원한을 품은 자네를 거두었던 것도…….”
그가 말을 멈추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오래전부터 영 대인의 야심을 경계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태사의 시선이 낙리에게 향했다.
“자네 가족들에게 가해진 그 부당한 화(禍)에 대해, 언젠가 올바른 단죄가 내려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다만 이제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말이 이어졌다.
“승상이 군권까지 노리기 때문이다.”
소 태사는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영 중랑장이 장군이 되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겠는가. 그 사람이 통솔하는 군대는 황제의 군대가 아니라 승상의 군대가 된다. 황상께서는 군부에서 정치색을 없애려 하시거늘. 승상은 그 방침을 정면으로 거슬러, 아들에게 공훈을 안배하여 군을 틀어쥐려 했다. 황상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기에 깊이 우려하고 계셨네.”
낙리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첫째 공자는……후계에서 밀려난 후, 오히려 승상과 멀어졌습니다.”
“자식이 아비의 뜻을 거스를 수 있었겠는가?”
태사의 어조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인정받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따랐을 것이야.”
소 태사의 시선은 창 밖의 어두운 하늘을 따라 흘러갔다가, 다시 낙리에게로 내려왔다.
“설령 영 중랑장이 아비의 뜻을 몰랐다 하더라도……그 존재 자체가 위험이었네. 승상은 필시 그 자리를 이용했을 것이야. 아들의 뜻과 상관없이 말이지.”
낙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을 쥔 손이 한쪽으로 기울면 나라가 무너지지.”
소 태사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다.
“나는 그걸 막았을 뿐이야.”
소 태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내 손이 피로 물든다는 것을 아네.”
낙리는 숨을 삼켰다.
“그러나 피를 묻히지 않고 나라를 바로 세운 자는 아무도 없었다. 폐주(廢主)를 몰아낼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소 태사가 낙리를 똑바로 보았다.
“이 나라엔 지금 누가 황제인지, 누가 대신인지조차 모호해졌네. 황상께서 이를 타개하고자 고심하고 계실 때에……신하로서 나서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니겠는가.”
소 태사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미 늙었네. 거기에 아들도 없고, 그나마 있는 외손자도 평범한 아이지. 다시 가문을 일으킬 방법도 그럴 기력도 없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욕심이 더 있겠는가.”
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내가 바로잡은 나라를 위해 끝까지 애쓰고 싶은 욕심만이 있을 뿐이야.”
낙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해야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떨렸다.
“그러니 자네가 이 늙은이의 작은 바람을 도와주기를 바라네.”
소 태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큰 흐름이 바뀔 거야. 그때까지, 자네는 자네 자리에 있어야 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속삭임처럼 길게 이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세상을 씻어내지 못한 채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