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벌교 여행
한때는 대학생의 필독서로 태백산맥이 거론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지 알지 못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그 책과 함께 보냈다.
정하섭은 또래 친구 같았고, 염상진과 김범우는 서울로 대학에 간 형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염상구는 집집마다 하나쯤 있는, 늘 부모의 걱정이 되는 막내 같았다.
그 겨울 내내 나는 책 속에서 살았다. 교과서에는 담기지 않던 말투와 숨결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우리 마을 어른들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나는 정치도, 이념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겪는 굴곡이 낯설지 않았다. 싸움이 남긴 상흔은 고향의 산골짜기에도 스며 있었다.
아마도 그 책이 나를 삐딱하게 만든 것이리라. 교과서가 전해주는 단정한 문장들보다, 소설 속 비틀린 인생들이 더 진실하게 다가왔다.
교실은 바른 길만을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부러지고 어긋나며 다시 일어서는 인물들에게서 더 큰 설득을 받았다.
그 이후 나는 세상을 곧게만 보지 못했다. 늘 다른 면을 궁금해 하고, 정답보다 의문을 먼저 품었다.
그 삐딱한 눈길은 내게 작은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자라 오늘의 나를 이루었다. 세상을 곧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면, 비스듬히 바라보는 눈 또한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책은 내 시야를 넓혔다. 작게는 이념과 사상을 달리 바라보게 했고, 크게는 민족의 비극을 개인의 삶으로 비춰보게 했다.
교과서 속 전쟁은 사망자의 수와 전투의 이름으로만 기록되었지만, 소설 속의 비극은 집집마다의 눈물과 밥상머리의 침묵으로 스며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른 진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겨울의 삐딱한 눈길은 내 안에 작은 씨앗을 심었다. 그 씨앗은 지금도 나를 곁길로, 그러나 내 길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