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 사파리 2018 스페셜 에디션 올블랙(all black)
라미가 생산된다는 독일의 어느 도시를 여행한 적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을 만큼 유서 깊지만 학생과 여행자들이 몰려들어 젊기도 한 곳. 한적하면서 활기차고 젊으면서 고색창연한 도시 ‘하이델베르그’. 라미가 이곳에서만 오직 완제품 상태로 생산된단 이야길 들은 후 도시와 라미 만년필이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라미를 이야기하려면 이렇게 독일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
기능주의 건축을 강조하던 독일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이 금과옥조처럼 새기는 문장이다. 정확하고 믿음직하다는 지금의 독일 제품 이미지는 대부분 여기서 연원 한다.
독일은 만년필 제조 강국이다. 몽블랑, 펠리컨, 그라폰 등 독일 만년필 브랜드의 위상은 독일 자동차나 카메라가 그들의 세계에서 누리는 위상 못지않다. 하지만 단언컨대 독일 만년필 중 바우하우스 철학을 충실하게 따르는 제품은 라미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보수적 브랜드란 소린 아니다. 무인양품의 CD플레이어 디자이너로 유명한 <후가사와 나오토>와 공동작업을 할 만큼 늘 변신과 변화를 꾀하는 브랜드가 라미이기도 하다. 그 도시와 라미가 닮았다는 것도 이런 모습 때문이다. 라미 사파리 역시 매해 새로운 색상으로 변화를 꾀한다. 하지만 늘 요란한 색상 일색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뭐랄까, 그건 (순전히 내 기준에서) 독일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조금씩 색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번 시즌에 아예 올블랙이라는 모델이 나왔다. 기존에도 챠콜 블랙이란 검은색이 있긴 했다. 하지만 막상 대보면 챠콜은 쥐색으로 보일만큼 이번 올 블랙(all black) 버전은 빛 샐 틈 없이 검다.
(참고로 라미 사파리의 디자이너는 볼프강 파비안으로 유사 시리즈인 알스타도 그의 작품이다)
매번 잉크를 채워 넣어야 하고 메모지를 늘 품고 다녀야 하는 만년필은 그 두 가지가 필요 없는 스마트폰에 비해 당연히 불편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년필을 불편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만나본적이 없다. 스마트폰에 남긴 기록은 0과 1로 이뤄진 신호체계에 불과하단 의심이 강하게 들지만 노트에 쓴 기억과 기록은 확실한 물리적 증거가 된다. 추문에 휩싸인 연예인이 SNS라는 디지털 공간에 굳이 손 편지를 써서 올리는 이유도 진심의 ‘증거’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진심이라면 가급적 보여줄 일이 없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