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책생각)

자신 없게 외친다, 때로는 오심도 일상의 일부다

by Yechan

VAR이 도입된 이후, 축구를 보면서 가장 아쉬운 건 골이 들어간 순간 시원하게 포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골망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선수들은 깃발을 확인하고, 심판 눈치를 보며 세리머니를 반쯤 참는다. 정확성을 얻은 대신, 우리는 그 찰나의 순수한 환호를 잃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일본 최고의 괴테 전문가 도이치는 가족과의 외식 중, 식당에서 나온 티백 꼬리표에서 낯선 영어 문장을 발견한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 Goethe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도이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말한’ 괴테가 ‘모든 것’에 대해 한 말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혼동되지 말고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처음엔 출처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테 전문가로서 요즘말로 긁힌다. 그런데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이것이 괴테의 모든 것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말한'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남긴 말. 그 가능성이 도이치의 마음을 붙잡는다.

유레카 같은 순간이었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VAR 판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는 어디인가. 괴테가 정말 이 말을 했는가. 도이치는 자기 나름의 VAR 여정을 떠난다.


수 많은 여정이 있었지만 끝내 문장의 정확한 출처는 확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정은 도이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학자로서의 삶이 전부였던 그가, 자기 이름을 가진 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여정.

결정적인 순간은 괴테에 관한 TV 강의였다. 원고를 쓰면서 도이치는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그 문장을 마지막에 넣어버린다. 괴테가 말했다고 단정 지으면서. 학자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고, 방송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감정이 요동쳤다. 자유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이제까지 도이치가 학자로서 쌓아온 탑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다... (생략) 하지만 이렇게 '괴테의 명언'을 자기 문장 속에 끼워 넣자 도이치는 분명히 '자유'를 느꼈다. 모든 것이 성취되어 가벼워졌다


단순히 규칙을 어긴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남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말한 순간이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이치는 그날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

그렇다. 적어도 각자 스스로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스스로의 의미와 언어만이 스스로의 세계를 대변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인간은 그럴 때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 존재이다. 그 것이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택한 것이기에 그것이 더 낫다.


이 여정 속에서 도이치는 두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


1. 동료교수 시카리


오랜 신뢰의 관계였지만, 저작 표절 사건으로 도이치의 마음에 금이 간다. 해명하는 자리?에서 시카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사상 전체가 아니라 파편으로 이해되지... (생략) 결국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잖아.


시카리는 사실 여부 자체보다, “그 말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가"를 중요하게 여겼다.

문장에 대해서 학문적 진위 확인에 모든 에너지가 몰빵 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괴테가 말했다’라는 식의 권위를 빌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자신만의 의미와 언어가 권위라는 블랙홀 속으로 상실되어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은 완전한 진실이 없는 의미의 연속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도이치는 시카리의 물음을 통해 한 개인의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이 권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받아들였던 구조였다는 점을 깨닫는다.


진위보다 의미를 먼저 묻는 사람. 도이치는 처음엔 그것을 학자의 실패로 읽었지만, 자신 역시 출처 불명의 문장과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시카리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학자 도이치가 아니라, 그의 오랜 친구로서.


2. 아내 아키코


어차피 아내는 연애 시절부터 아무리 설명해 줘도 『서동시집』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했고, 결혼한 뒤에 선물한 『헤르만과 도로테아』와 도이치가 번역해서 아내에게 바친 『친화력』도 읽었는지 말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가 푹 빠진 유튜버는 독일인 정원사였다. 도이치는 그 이상 알지 못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내에게 소소한 오락거리가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하는 감탄이었다. 실제로 그는 아내가 평소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버가 나오는 영상을 TV로 틀자 얼른 자기 방으로 물러나 쓰즈키의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학자와 학자의 아내라는 틀 안에 있었다. 도이치는 아내에게 괴테의 저작을 꾸준히 선물했지만, 속으로는 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정원 가꾸기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자기 방으로 물러나 논문을 읽었다.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장의 출처를 찾으러 떠났던 독일 여행 중 아내가 좋아하는 유튜버이자 정원사인 베버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뜻밖의 말을 듣는다.


“도이치 씨, 아키의 작품은 참 근사해요.” 베버 씨가 말했다.

“당신 덕분이죠.”

“아니에요” 하며 베버 씨가 미소 지었다. “괴테의 『친화력』에 나오는 정원을 재현한 작품이 특히 멋졌어요.

“허, 아내가 그런 걸 만들었나요?” 도이치가 물었다.

“네, 모르셨어요?” 베버 씨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선물한 책이라서 제일 먼저 도전했대요.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 후에 아내를 만나서]

도이치는 문득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아키코, 『친화력』에 나오는 정원을 만들었다며?” 아내의 손끝을 만진다. 깍지를 낀다.

“아아, 베버 씨가 말했어?” 아내는 도이치의 손을 맞잡는다.

“응. 대단한데. 다음에 보여줘.”

“전에 보여줬잖아.” 아키코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그럼 다시 한번 보여줘. 집에 가면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나도 만들어 보고 싶어 졌어.” 도이치가 말했다.


도이치는 아마 한동안 멍했을 것이다.

아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을 거라고, 읽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그 책으로 정원을 만들고 있었다. 말없이, 오래전부터.

무관심했던 날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자신이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조용히 자기 방식으로 사랑을 이어온 아내가 보였을 것이다. 감겨 있던 눈이 뜨이는 건 그런 순간이다. 극적인 고백도, 긴 설명도 없이.

그래서 학자 도이치가 정원을 배우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이 소설에서 도이치의 가장 조용하지만 큰 움직임이다. 학자 도이치의 삶에는 정원일을 나중에 시간날 때 배우겠다는 정도의 말도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했다. 말이 되는가? 말이 된다. 사랑은 그전엔 말이 안 됐던 것들이 말이 되기 시작하게 하니까.


결국 도이치가 이 긴 여정 끝에 손에 쥔 것은 새로운 지식도, 검증된 문장도 아니었다. 자기 언어를 되찾은 것, 그리고 그 언어로 비로소 보이게 된 것들이었다. 스스로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일은, 결국 감겨 있던 눈을 뜨는 일이다. 그리고 그 눈은 사랑을 본다.


소설 속 도이치의 장인이 남긴 말이 그래서 오래 남는다.

'네 노력은 사랑 속에 있어야 하고, 네 생활은 실천 속에 있어야 한다'

괴테가 모든 것에 대해 말했다면, 이 문장은 이 소설이 말한 모든 것에 대한 말처럼 읽힌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것들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 무게들을 다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결국 어디를 향하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그 목적지가 사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노력은 사랑 속에, 우리의 행동양식은 사랑을 실천하는 속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한 장인어른의 말은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적당한 톤으로 외치고 싶다.

오심도 일상의 일부다. 완벽한 판정이 늘 필요한 건 아니다. 때로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답게 포효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VAR은 가끔씩 꺼두자.

가장 필요한 건 나다운 것일 테니.


이론은 모두 잿빛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괴테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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