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무 이야기
약한 녹색에 갈색이 살짝 섞였다. 보일 듯 말 듯 솜털도 났다. 아직 추운 듯 서로를 감싸 안고 있다. 초 봄에 참나무들은 태양 빛을 에너지로 삼고 공기와 물을 재료로 삼아 봄의 천사를 피워 낸다. 이 신록의 정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리움으로 변하여 내 마음 깊숙이 각인되었다. 고향 집 뒷산은 우리 집 소유로 참나무가 주된 수종이었다. 이 숲에서 참나무가 연녹색 잎을 내미는 초 봄이 되면 우리 집 주위는 흐릿하면서도 부드러운 수채화처럼 변했다. 뒤 뜰 새싹이 아직 돋지 않은 누런 잔디 위에 앉아 초 봄의 햇살을 받으며 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 곤 했었다. 내가 개나리나 목련 꽃이 피는 시점보다는 이때를 봄의 시작으로 느끼는 이유다.
고향의 참나무
잎이 광합성을 통해서 생성한 화합물은 도토리에 보내서 저장된다. 열매가 녹색에서 갈색으로 변색되기 시작하면 나의 어깨도 긴장한다. 떡메로 참나무를 때려서 그 진동으로 도토리들을 나무에서 떨어트렸다. 가을 내내 한 가마니 정도의 도토리를 수확했다. 그다음 과정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담당했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 도토리를 말리고, 방앗간에 가서 빻고, 독에 넣어 물을 내려 떫은맛을 빼내고 묵을 쑤었다. 도토리 묵은 겨울 내내 우리 집의 중요한 간식이면서 반찬 역할을 했다.
뒷산 나무 중에 특별한 참나무 한 그루를 기억한다. 수령이 오래되어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나무 둘레가 성인 두 명이 팔을 벌려 감싸 안아야 할 정도였다. 이 나무는 떡메로 때리면 미동은 했지만 도토리를 떨굴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바람이 떨군 도토리를 주어야 했다. 뒷산의 참나무들은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송이버섯 재배업자에게 팔렸다. 그 돈의 일부는 내 학자금으로 쓰였다. 이 나무들은 벌목의 톱 날에 사라졌다. 방학 때 집에 와보니 그 빈자리가 사람이 떠나간 만큼이나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국민학교 등굣길
국민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자그마한 고개를 넘어야 했고 구 고개 정상에 성황당이 있었다. 성황당 고갯길은 참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고 가을이면 도토리가 많이 달렸다. 5학년 때라고 기억한다. 하교할 때 도토리가 길에 많이 떨어져 있길래 보이는 족족 책가방에 주워 담았다. 책가방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넣을 곳이 없어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도토리를 책가방 안에서 꺼내다 보니 도시락 반찬을 넣어 갔던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 있음을 알았다.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평소 도토리에 대한 나의 집착을 잘 알고 계셨던 어머니는 깨진 유리병을 보시고는 '아이고야'라는 말 한마디만 하시고는 가방을 들고 치우러 가셨다.
2019년 설 전날 세종시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교통체증을 피하여 아침 7시에 출발했다. 도착하자마자 성묘를 마치고 오후에 국민학교 등 하교 길이었던 성황당 고갯길을 찾아갔다. 이 길을 걷는 꿈을 가끔씩 꾸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성황당 고개를 천천히 넘어가 보곤 했다. 어느 곳에 어떤 형태의 참나무가 있었고 무슨 모양의 도토리를 맺었는지 기억한다. 고갯길의 모양과 성황당에 돌이 어떻게 쌓여 있었고 그 위에 천이 나부끼던 모습도 기억한다. 30년이 넘어 찾아간 그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고개는 옛 모습 그대로 나를 맞아 주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참나무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 더 우람해진 모습을 추측했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세대 교체된 어린 참나무들이었다. 벌목 후 다시 자란 나무들 같았다. 정상에 차를 세워놓고 내렸다.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자그마한 내가 보이는 듯했다. 그 위로 오후 햇빛이 만든 기다란 내 그림자가 겹쳐졌다.
연곡리에서 추억을 되살리다
연곡리 집을 구한 후에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들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참나무가 소나무, 밤나무와 함께 산 생태계를 삼분하고 있었다. 가을에 도토리가 떨어질 무렵 다시 산을 찾았다. 등산로에 도토리들이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크고 잘 생긴 놈을 골라 손에 쥐고 그 감촉을 느껴보았다. 깍지에 붙어 있던 머리 부분은 껄끄럽고, 몸통 부분은 단단하고 매끄럽다. 한 되 정도를 주어 와서 쟁반 위에 쏟아서 가을 햇빛이 잘 드는 난간 위에 두고 말렸다.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도토리들은 진한 갈색으로 반짝반짝 윤이 난다. 시간이 지나면 윤기와 습기를 잃어버리고 연한 갈색으로 변한다. 마른 도토리들은 방앗간에서 빠은 후 묵을 만들어야 하나 연곡리에서는 많은 양을 모으지 않았다. 야생 동물들의 먹이인 도토리를 줍지 말라는 정부의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도토리가 말라가는 과정을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던 기억을 반추한 후 말린 도토리들은 집 앞 산속에 다람쥐들의 먹이로 뿌려 주었다. 이후로는 다시 도토리를 모으지 않았다.
도토리는 어린 시절 신록의 참나무가 도토리를 맺는 과정, 도토리 줍기, 묵 쑤기, 한 겨울 김치 묵 국을 말아먹던 추억이 응집된 추억의 결정체다. 지금도 가을이 오면 길가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어 들고 청소년기의 추억을 살포시 꺼내서 들추어 본다. 잘 익은 도토리 알맹이처럼 그 추억들은 단단하게 기억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고 희미해지지 않았다. 가을이 오면 매번 잘 익어 되살아 난다. 미르마을 앞산 한 자락에서 도토리 하나를 주워 들고 추억을 반추하며 산책을 한다. 혼자가 아니다. 시골집에서는 주로 소나무 장작을 난방용으로 썼다. 참나무는 송이버섯 재배용으로 팔렸다. 용인 집 난로 용으로는 참나무만 사용한다는 사실을 마을분들에게 들었다. 참나무는 소나무에 비해 그을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했다. 판매처에 주문했더니 트럭으로 싣고 와 쌓아 주었다. 1톤에 23만 원 했다. 이 정도면 주말에만 쓰면 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주중에도 계속 사시는 분들은 2톤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배달된 장작은 6개월 정도 말랐다고 했다. 난로에 때 보니 불도 잘 붓지 않고 화력이 약했다. 일 년 이상 말려야 연기도 적게 나고 화력도 강함을 알았다. 거실 난로 속에는 참나무 장작이 사는 동안 저장해 둔 태양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식탁 위에는 아내가 표고버섯볶음과 도토리 묵무침을 올렸다. 추억을 밥 삼아 같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