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원 전세로 시작한 전원생활
위기를 넘기고
항암 치료가 진행되면서 아내의 고통도 함께 증가되었다. 결국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한 아내는 중환자실에 입원해야만 했다. 처형이 의사를 만나고 와서 심각한 얼굴로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마음 정리를 하셔야겠습니다.”
특정 수치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다고 하셨다. 심각성을 모르는 아내는 빨리 치료를 끝내고 집에 가서 편하게 누워 있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를 바라보고 고개만 끄덕였을 뿐 말은 할 수 없었다. 입보다 눈이 먼저 말할까 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현대 의학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현대 의학이 남긴 상처는 깊었고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보듬고 돌보아야 했다. 퇴원 후 몇 개월은 일어나 있는 시간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 후 몇 개월은 걸음마를 연습하는 아이처럼 지내야 했다. 아주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일 년이 넘게 걸렸다. 이 시점에서 시골로 내려가 생활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딸과 아들의 교육 문제로 귀농이나 귀촌은 대안이 될 수 없어서 주말에만 시골로 내려가 사는 방식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5도 2촌(5都2村)의 삶, 즉 주중 5일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주말 이틀은 시골에서 생활하는 방식이었다.
마지막까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진영에서 투쟁을 하시던 아버지도 백기를 들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셨다. 고향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불편한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도회지에서 편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 하셨다. 결국 아버지는 보상금을 받고 세종시로 이사하셨다. 어머니의 요청대로 시내 한가운데 빈 탕을 사셔서 집을 새로 지으셨다.
퇴직 후 내려가 살 생각을 하던 터전이 없어져 버렸다. 아내의 건강을 챙겨야 했다. 주말을 이용하여 전원주택 찾기에 나섰다.
원하는 집의 조건
주말에 전원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 우리 부부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원하는 집의 조건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최우선으로 고려된 요소는 아내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되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전세금으로 지불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과 집에서 전원주택까지의 이동 거리, 텃밭의 유무 등을 고려하였다. 이런 여러 고려 요소들 중에서 우리 부부는 원하는 집의 조건을 여섯 가지로 정했다.
첫째, 건강한 삶을 되찾기 위하여 집은 되도록이면 숲 속에 있거나 숲과 가까워야 한다. 둘째, 살림집이 아니므로 너무 크지 않아야 한다. 셋째, 방범과 한밤중의 무서움을 고려하여 전원주택 단지 내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넷째, 텃밭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전세로 구하되 예산 한도를 맞추어야 한다. 여섯째, 서울 집에서 차로 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다.
파라다이스를 만나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집을 찾기 위하여 인터넷 서핑과 실제 현장 답사를 일 년에 걸쳐 실행했다. 파주, 김포, 오포읍, 양평 등을 다녀 봤다. 파주에는 그 당시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땅콩 주택을 기본으로 하여 모 업체가 분양하는 전원주택단지를 가 봤으나 숲과 텃밭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양평은 우리 부부가 무작정 차를 몰고 답사를 한 번 다녀왔고, 직장 동료의 아버님이 은퇴 후 살고 계신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분이 살 만한 곳을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양평은 전반적으로 공장이 적고 지세도 좋아 서울 인근의 최고의 전원주택 단지로 꼽힌다. 내가 발 품을 팔아 본 결과도 동일하다. 우리 부부도 잠정적으로 양평을 제1후보지로 정했었다. 오포읍은 서울 집에서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분당과 가까운 관계로 전세 값이 우리 부부가 정한 한도를 훌쩍 넘었다.
2012년 4월, 그동안 탐사해 보지 않은 경기도 광주시 인근을 돌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부동산 두 곳에 방문 약속을 잡았다. 첫 번째 부동산과 두 곳을 방문해 보았으나 우리가 정한 조건과는 차이가 많았다. 두 번째 부동산 중개인과는 곤지암읍 연곡리를 가보기로 했다. 연곡리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마을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다가왔다. 마을 중앙의 적당히 높은 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의 등성이가 펼쳐져서 전반적으로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마을 전체가 남향이어서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부동산이 소개한 집은 마을 입구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집을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이 집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쪽으로 산등성이가 마을 입구까지 흘러내려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겨울 북풍을 막아줄 적당히 높은 산이, 남쪽으로는 마을이, 서쪽으로는 밭과 숲이 있었다. 현대적인 아담한 흰색 2층 집, 아래층에는 거실과 화장실과 주방이 있고 위 층에는 앞쪽에 거실이, 뒤편에 방 두 개가 놓인 구조였다. 특히 2층 거실에서 내려 보는 밖의 풍경은 우리 부부가 꿈꾸어 왔던 바 그대로였다. 정남향 집이라 봄 햇살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따뜻하면서도 여유롭고 싱그러웠다. 집 뒤로는 아홉 집이 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 주민 중 한 사람이 기획을 해서 열 가구가 같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전세금은 1억 원이었다. 서울 집에서는 차로 한 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텃밭은 임대할 곳이 많았다, 집의 크기는 30평 정도로 적당 하였다. 우리 부부가 집을 구하기 전 마련한 기준에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집을 찾게 되었다. 그동안 발 품을 열심히 판 보람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다음날 바로 전세 계약을 체결했다.
전세 계약이 끝나고 나서 살림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간하게 살기로 아내와 합의가 되어 있었다. 주말에만 와서 지내고 가는데 복잡한 살림이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도시 살림집에서 쓰지 않는 식기들을 옮겨왔다. 친척들도 안 쓰는 그릇들과 이불을 보내왔다. 세탁기와 가스레인지는 전세 집에 빌트인 되어 있었다. 소파는 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투자는 필요했다. 냉장고는 스탠드형 김치 냉장고를 샀다. 일부 칸은 일반 냉장고로 쓸 수 있는 기능이 있어서 유용했고 슬림해서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았다. 전원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갈 때 보조 냉장고로 쓸 때를 감안했다. 바비큐 그릴은 필수였고, 전기장판은 겨울을 나면서 필요해서 중간에 구매했다. 음악도 필수적이라서 오디오도 준비했다. 스피커 통을 중고로 인터넷에서 사고 가지고 있던 부품들로 스피커를 내가 직접 조립했다. 앰프는 진공관 인티그레이트드 앰프를 샀다. 콤팩트 디스크 플레이어도 중고로 저렴하게 구매했다. 이게 다였다. 단출하게 5도 2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