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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Sep 15. 2023

무늬만 아저씨

초등 친구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세종에서 차를 운전해서 청주에 소재한 예식장을 찾아갔다. 결혼식장에 도착해서 친구의 딸 결혼을 축하해 주고 친구들과 피로연장으로 향했다. 


별관에 마련된 피로연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친구의 딸뿐만 아니라 다른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식사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본관과 신관에서 대여섯 건이 동시에 진행되고 피로연은 별관의 홀에서만 진행하다 보니 다른 결혼식 손님과 함께 뒤섞여 식사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외관상 피로연장은 넓어 보였지만, 뷔페 음식을 담으려면 오랫동안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먹을 음식을 접시에 담고도 앉을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서성이며 자리를 찾아야 했다.


마침 먼저 온 친구들이 식사하고 있어 그곳에 비어 있는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피로연장을 예식 손님별로 구분해서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 좋을 텐데. 한 장소에서 수백 명이 뒤섞여 식사하다 보니 피로연장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피로연장에서 식사를 끝내고 친구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딸의 결혼식을 마친 친구가 내려와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되돌아갔다.


결혼식도 끝나고 식사를 끝낸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동행할 사람을 찾았다. 나도 세종으로 가려고 막 일어서는데 서울과 의정부에 사는 친구가 과천으로 가느냐고 묻는다. 


나는 과천이 아닌 세종으로 갈 거라며 동행할 친구가 없으면 세종에 같이 가서 바람이나 쐬고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 몇 명이 좋다면서 따라나섰다. 


친구들을 차에 태우고 세종에 도착하자마자 버스표를 미리 예약했다. 주말이라 버스를 예약하지 않으면 서너 시간을 기다렸다 타고 가야 한다. 버스표를 먼저 끊어 놓고 친구들과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호수공원 옆 세종국립도서관에 차를 주차하고 친구들과 호수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호수공원에는 가족과 연인들이 찾아와 거닐고 있었다. 


호수공원으로 걸어가며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자 붉은색 페인트를 칠한 하트 모양 안에 들어가 자세를 취했다. 친구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즈를 잡는데 젊은 아주머니와 함께 온 아이가 친구들이 들어간 장소에서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할머니들 사진을 찍고 나서 찍어주겠다며 아이를 달랬다. 친구들 사진을 찍고 나서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해 주자 친구들은 “내가 벌써 할머니야!”라면서 웃었다. 


친구들과 나이 듦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세히 얼굴을 바라보니 정말 할머니처럼 보이네.”라고 말하자 친구들이 다시 까르르 웃는다.


나나 친구들도 내년이면 이순이다. 요즈음 건강 백세 시대라는데 이순은 아직 한창이란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머리가 희고 얼굴에 검버섯이 하나둘 피어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부담스럽지 않은데 친구들은 머리도 희지 않고 얼굴에 잔주름도 없는데 할머니로 보이니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 같다.


친구들과 걸어가다 “할머니 친구들! 빨리 갑시다.”하고 외치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웃는다. 호수공원 수상 무대를 배경으로 친구들 사진도 찍어주고 공원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버스 시간이 다가왔다.


호수공원 구경을 마치고 친구들을 차에 싣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서울 가는 버스에 태워 보냈다. 친구들을 보내고 세종 원룸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면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나이와 세월은 속일 수가 없다. 옛날 같으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나이가 아니던가. 호수공원에서 아주머니가 친구들에게 한 할머니란 말은 친구를 향해 한 것이 아니라 내게 던진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중년이 아닌 장년의 할아버지로 변한 것을 알게 해 준 날이다. 나이 듦은 자신이 아닌 주변에 의해서 결정된다. 앞으로 친구의 아들이나 딸 결혼식에 갈 때는 옷이나 얼굴에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젊은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것보다 “아저씨”란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가는 세월이야 누구를 탓할 수는 없지만, 오늘은 자신의 몸을 젊게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 소중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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