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역 Dec 16. 2023

소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아리랑 노래는 한민족이 살아온 한과 슬픔과 모진 역사의 굴곡을 대변하는 노래다.


그리고 아리랑은 노래만 불러도 눈물과 한과 슬픔이 저절로 배어 나온다. 이러한 한과 슬픔을 담아낸 소설 ‘아리랑’을 조정래 소설가가 세상에 내어 놓은 지 꽤 되었다.


이 소설은 눈가에 눈물을 훔치지 않고는 읽을 수 없고, 읽으면 읽을수록 한과 슬픔이 묻어 나온다. 그만큼 소설 ‘아리랑’은 흥에 겨워 신세를 한탄하기 위해 부르는 이야기도 아니고, 일을 하다 힘이 들어 잠시 쉬면서 부르는 민요도 아니다. 


이 소설은 나를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 조선이란 나라가 기울 수밖에 없었고, 양반과 상놈을 차별했던 신분제도가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금도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한과 울분이 '아리랑'이란 소설을 뛰어넘어 현대사로 이어지면서 한 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처럼 12권이나 되는 大作 아리랑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할아버지들이 삶의 뿌리인 농토를 잃고, 나라를 잃고, 명분 없이 죽고, 고문을 받으며 힘없이 죽어간 안타까움 때문에 눈물과 한숨을 쉬면서 소설에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조선에서 태어나 목숨의 연명이 어려워지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만주로 가서 민족의 맥을 이어간 할아버지들의 한 많은 사연을 읽으면 가슴에는 답답함과 한스러움만 가득해졌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전쟁과 가난과 독재와 같은 고난의 세월을 넘어 먹고 살아갈 만큼 삶의 부피와 깊이를 넓혔다. 이런 삶의 기반과 뿌리를 다룬 것이 소설 ‘아리랑’이다.


조선의 힘없는 백성들은 농토와 나라를 잃은 것을 찾기 위해 풀뿌리로 생명을 이어가고, 목숨보다 더한 인간의 양심도 버리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연약한 목숨마저 바쳤다.


이에 비해 양반은 지주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인과 앞잡이를 이용하여 나라를 잃은 것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이용했다.


그리고 외세에 의해 나라가 쓰러져 가는 것을 지키기 위한 힘을 기르기보다 임금한테 상소나 올리는 나약한 수단에 의지했다. 자신의 농토를 지키기 위해 신분질서 유지와 지주로서 재산을 지키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양반이란 신분과 머리에 고리타분하게 틀어 올린 상투란 잔재다.


농민은 갖고 있던 농토도 빼앗기고, 지주에게 소작도 떼이는 설움 속에 먹고살아갈 길이 없자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고향과 나라를 등지고 만주나 연해주로 눈물을 뿌리며 떠났다.


동학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관리와 지주의 행패다. 지주는 관리와 손을 잡고 소작인을 괴롭혔고, 관리는 임금을 빙자하여 온갖 세금을 거두어들이며 농민을 착취했다.


이를 참다못한 농민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 동학이다. 조선은 동학을 잠재우기 위해 외국군대의 파병을 요청하고, 일본과 조선의 군인은 동학에 참여한 백성들을 뿌리 뽑고자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은 송수익이다. 그는 조선이 아닌 다른 세상을 세우기 위한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 삼았다. 그의 신분은 양반이다. 양반이면서 자신과 함께 살던 머슴과 식모에게 하대하고 그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가겠다고 하면 기꺼이 집을 떠나게 했다.


또한 그의 사상적 근본은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임금이 아닌 백성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선각자다. 이는 동학의 정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 '아리랑'이란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데 농민, 사냥꾼, 상인, 노비 등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평등사상에 입각해서 나라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가담시켰다.


이처럼 그는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자 고향과 처자를 버리고 만주에서 활약하는 것이다. 소설 ‘아리랑’을 이끌고 겨레에 등불처럼 밝혀주는 역할을 소설가는 은연중에 송수익에게 부여했다.


어쩌면 소설가는 역사의 소용돌이인 근대사의 모순과 문제에 대한 해법을 작품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송수익을 도와 조선과 만주를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주지스님의 양해를 얻어 절을 뛰쳐나온 공허스님이다. 이 스님은 때로는 살생을 일삼는 파계승으로, 때로는 실타래와 같이 엉킨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인의 역할을 맡았다.


이 소설에서 공허스님은 소설가 자신의 화신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이나 아니면 다른 익명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몫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의 역할을 소설 속에서 펼쳐 보인다.


작가도 자신이 추구한 인생을 ‘아리랑’이란 소설에서 공허스님을 내세워 표현했다. 마음에 갖고 있는 고통과 한을 못 이기는 사람도 공허스님과 대화를 나누면 풀어진다. 우리 세대에게 빛과 혜안을 소설가는 공허스님을 통해 전해주려는 것이다.


조상들이 살아온 세월을 다시 거슬러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나마 그 길은 소설로나 가능하다. 민족의 수난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말은 배가 부르고 난 뒤에나 찾는 수식어다. 그리고 수치스럽다 삶의 모독이다 하는 말도 등이 따뜻해진 뒤에나 찾는 말이다.


소설 ‘아리랑’을 읽으면 수치스럽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슬픈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답답하고 한스러울 뿐이다.


소설 아리랑을 읽으면 힘과 무력이라는 바람 앞에 너무도 무기력하고 박절한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슬프기만 하다. ‘소설은 허구다.’라고 하지만 허구도 어느 정도 사실이 있어야 꾸며낼 수 있다.


근본적인 바탕도 없이 허구를 꿈꿀 수는 없다. 역사소설은 허구적 한계가 따른다. 추리나 무협소설은 사건 없이 추리가 가능하지만 역사소설은 다른 소설보다 역사적 사건이 있어야만 소설로 다룰 수 있다.


따라서 소설에서 역사소설 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소설 ‘아리랑’도 일종의 역사소설이다. 그 이유는 소설가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더듬어 다니며 자료를 모아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소설에 나오는 이름과 사건은 하나하나 깊은 사연이 내재되어 있다. 그 사건을 소설가가 나름대로 이야기를 추가하여 만든 것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에 담긴 한 많은 사연과 역사를 감히 몇 줄로 줄여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다. '아리랑'을 읽고 진정으로 작품을 평가하려면 수십 번은 읽고 작품과 역사적 사건에 얽힌 내용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소설을 한 번 읽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할 수 없다. 단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설 '아리랑'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유하는 차원의 소감을 적은 것뿐이다.


이제 걸음마를 막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그저 소설을 읽고 난 뒤 풋풋한 마음과 느낌을 적어 본 것이고, 나머지는 독자들이 '아리랑'을 읽어보고 평가하기 바란다.


소설에 대한 평가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우리라고 생각한다. 계절이 새록새록 깊어 가는 밤에 '아리랑'이란 소설을 읽고 짙어지는 민족의 정기를 느끼면서 우리의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기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청초 우거진 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