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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Mar 28. 2024

손주는 꽃이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되니 매화꽃, 산수유꽃, 개나리꽃, 목련꽃이 순서대로 피어난다. 내가 봄을 좋아하는 것은 겨우내 빈 몸이던 나뭇가지에 함초롬히 솟아오른 봄꽃을 바라볼 수 있어서다.


하얗고 노란색의 꽃이 나뭇가지에서 피어나면 나무에 다가가서 한참 동안 꽃을 들여다보게 된다. 따스한 봄날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꽃에서 전해오는 환한 꽃내음이 코 끝에서 느껴진다.   


요즈음 주말이면 다른 일은 제쳐 고 딸네 집으로 봄꽃을 만나러 간다. 내가 딸네 집을 찾아가는 이유는 딸이 예뻐서도 그렇다고 사위가 잘생겨서도 아니다.


나이가 들어 딸네 집을 찾아가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봄꽃과도 같은 귀여운 손주를 보고 싶어서다.


지난해 가을 딸이 손주를 낳았다. 손주가 태어나면서 두 집안의 가족들은 바빠졌다. 주중에는 사돈 네가 손주를 돌봐주고 주말에는 우리가 가서 돌봐준다.


딸이 결혼한 후 딸네 집을 함부로 찾아갈 수 없었는데 손주가 태어나면서 아무 때나 찾아간다. 딸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손을 먼저 씻고 나와 손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근황을 살펴본다.


그리고는 손주가 분유를 먹고 놀고 있으면 손주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집안을 한바퀴 휘휘 둘러본다.


손주는 호기심이 왕성한 것 같다. 손주를 품에 안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 이것저것 구경하려고 얼굴을 사방으로 돌려가며 바라본다.


그렇게 손주를 안고 방 구경을 다니면 머릿속에는 내 딸이 태어났을 때 딸을 품에 안고 사당동 주택가를 거닐 던 추억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손주는 가슴에 안는 순간부터 온몸으로 좋아하는 몸짓과 표정을 지으며 방긋방긋 웃는다. 내가 딸을 가슴에 안고 돌아다닐 때 딸이 주처럼 방긋방긋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그런 손주의 귀여운 모습 때문에 보고 싶고 안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가 보다. 누군가 아이는 꽃이라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나뭇가지에 핀 꽃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꽃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손주도 가슴에 안겨 온갖 몸짓과 발짓을 해가며 웃는 모습을 보면 마치 봄꽃처럼 바라보인다. 손주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할아버지 품에 안겨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세상을 구경하려고 한다.


내가 결혼해서 딸을 키우던 때와 나이가 들어 손주가 태어나서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왜 내 딸과 손주를 안았을 때 느낌이 다른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딸이 태어났을 때 품에 안고 다니던 때와 손주를 품에 안고 다니는 느낌과 정서가 사뭇 다르다. 손주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이제는 삶이란 의무감에서 어느 정도 해방감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딸보다 손주가 더 애틋하고 귀엽게만 바라보인다.


나의 이런 느낌과 감정을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느끼셨을까. 고향에서 평생을 농사지으면서 손주가 태어났을 때 나와 같은 감정이었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하기만 하다.


지금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 느껴본 감정을 아버지와 어머니도 느끼시지 않았을까. 내 자식보다 손주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사람이면 느끼는 공통적인 생각과 감정이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큰 아이를 품에 안고 직장에서 퇴근해 매일 같이 집 주변을 돌던 때가 생각난다. 사실 그때 큰 아이는 낮과 밤이 뒤바뀌어 아내와 내가 몸 고생 마음고생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려니 새삼스럽고 손주를 품에 안고 생각하려니 더 아련하게 떠오른다. 손주를 품에 안고 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너를 키울 때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손주를 안아보니 이런 감정이 들더라." 하는 비교의 말이다.


지금에 와서 딸을 어떻게 키우고 재우고 했는지 하는 사소한 일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손주를 품에 안고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그때의 일들이 무시로 떠오른다.   


따지고 보면 딸이나 손주나 모두 내 자손인데 두 자손을 두고 너무 비교하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딸을 자주 안아 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 손주를 매일 안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따뜻한 봄날에 아파트 단지 앞 공원 언덕에 봉긋이 핀 하얀 목련꽃처럼 내 손주도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목련꽃보다 더 화려한 인생의 화양연화를 꽃피우고 즐기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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