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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Apr 17. 2024

연정

산버들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오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홍랑).


이 시조는 조선시대 기생 홍랑이 남긴 것이다. 시조에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애틋한 감정과 마음이 담겨 있다.


홍랑은 북방인 경성의 기생으로 북평사로 벼슬살이를 온 최경창을 만났다. 두 사람은 신분과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풍류와 문학에서 서로 뜻이 맞아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만난 지 일 년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북평사를 떠나는 최경창을 따라 홍랑은 영흥의 함관령까지 따라왔으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최경창은 저쪽 숙소에서 묵고 홍랑은 이쪽 숙소에서 묵었다.


이때 홍랑은 최경창을 연정 하는 마음을 한 편의 시조로 짓고 거기에 자신의 상징인 버들가지를 꺾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냈다.


이 시조를 읽으면서 사랑은 말보다 시로 써서 전하는 마음이 운치가 있고 님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느낄수 있다. 사랑은 말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수백 번 외쳐도 입을 떠나는 순간 사랑도 날아가버린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시에 담아 표현하면 평생을 간다. 홍랑은 자신을 산버들에 비유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시에 담아 님에게 보내면서 산버들에서 새잎이 나거든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오직 시로써만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곁을 떠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해줘도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떠나는 사람에게 산버들을 꺾어서 시와 함께 전한 것이다.


이 시조의 배경은 봄날에 홍랑이 님과 이별에 앞서 촛불을 피워 놓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앉아 시조를 짓고 이튿날 산버들을 꺾는 가녀린 손길과 인편에 시조와 함께 산버들을 보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저 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님에게 산버들을 님이 머무르는 곳에 꽂아 두고 그곳에서 새잎이 돋아나면 자신으로 여겨달라는 것은 시가 아니면 형상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늘 아침 봄비가 내려 우산을 받쳐 들고 출근했는데 바람에 빗물이 흩날려서 우산을 쓰고 온 보람도 없이 옷이 홀딱 젖어버렸다.


봄비를 피한다고 한 것이 반대로 옷을 흠뻑 젖게 만든 것은 누구의 소행일까. 그것은 나도 너도 아닌 바람이다. 연정도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바람처럼 이리저리 흩뿌리며 다가오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어느 시대 어느 시절이나 사랑과 관련한 이야기는 은밀함과 내밀함과 은근함이 배어 있다. 미국의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처럼 사랑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봄비가 내리는 날에 우산을 받쳐 들고 출근한 것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서다. 조선시대 홍랑이 산버들을 꺾어 최경창에게 보낸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아쉬워서다.


나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것 같지만 동일하지 않은 관계다. 이타적인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기우느냐에 따라 사랑의 관계와 깊이는 달라진다.


봄비가 내리는 날에 제천천에서 천변을 고르고 다리를 수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그들이 아침부터 비를 맞아가며 제천천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자신과 일을 사랑해서다.


오늘은 나도 홍랑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산버들이 아닌 분홍색 영산홍을 한 아름 꺾어서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홍랑처럼 운치 있는 시를 지어 영산홍과 함께 보내고 싶다.


아침 출근길에 고교 시절 수업 시간에 들었던 홍랑의 시조가 떠올라 연정에 대한 글을 써보았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수단은 많다.


비록 홍랑처럼 시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봄비에 젖은 눅눅한 사랑의 마음을 시로 적어 나를 영원히 사랑해 주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영산홍과 함께 보내주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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