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고향에 봄나물을 뜯으러 갔다 왔다. 그간 봄날씨가 변덕을 부려 이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두릅순과 쑥을 채취하러 간 것이다.
서울을 등지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 되면 마음에는 늘 무언가가 꽉 들어찬다.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반갑고 정이 가듯이 가슴에는 알 수 없는 밀물이 밀려와 잔잔하게 등불을 밝혀주는 것 같다.
최근에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 하나 더 생겨났다. 경부에 이어 중부고속도로가 뚫리더니 새로운 구리세종 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고향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생겼다.
새로 개통된 구리세종 간 고속도로는 안성까지 거의 터널이고 아스팔트가 경부와 중부와는 확연히 다르다. 내가 운전하는 차는 경부와 중부에서 시속 120킬로 속도로 달리면 덜덜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런데 구리세종 간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140킬로 속도로 달려도 차의 떨림 현상이 없다. 아스팔트가 좋은 것인지 공법이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보다 근 이십여 분 일찍 고향에 도착했다.
고향집에 들어가 간단한 연장을 챙기고 두릅순이 자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고향집을 나서면 저 멀리 고향을 둘러싼 시루봉과 산의 마천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향의 언덕진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 아버지 산소를 둘러보고 산소 위에 올라가 두릅나무를 살펴보니 두릅순 새싹이 자라다가 꽃샘추위로 얼어 죽었다.
어쩔 수 없이 산소를 내려와 어머니가 관리하는 고사리 밭에 들어가 고사리가 나왔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니 아직은 나오지 않았다. 고사리 밭을 뒤로하고 대감 산소 위에 자리한 향골 골짜기를 향해 터벅터벅 올라갔다.
향골에는 집안의 어른들 산소가 여럿 자리하고 있는데 명절마다 찾아가서 성묘하는 곳인데 골짜기가 깊어 올라가려면 숨이 차서 몇 번은 쉬었다가 올라가야 한다.
향골 골짜기에 올라가 잠시 산소에 앉아 쉬면서 고향을 내려다보니 아랫마을에 자리한 태령산과 문안산과 봉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겹겹이 쌓인 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향골 산소 주변에서 자라는 두릅나무를 살펴보니 이곳도 두릅순이 약 1센티 정도 자란 것이 있고 대부분은 순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고향에서 두릅순 채취는 어려울 것 같다.
향골을 뒤로하고 내려오며 개울가나 들녘에서 자라는 쑥을 바라보니 아직 눈에 띌 만큼 자라지 않았다. 고향의 산골짜기를 한 바퀴 돌고 오자 봄나물을 뜯으러 고향에 왔지만 빈 손이다.
비록 고향에서 봄나물은 채취하지 못했지만 가슴에 따뜻한 봄기운만 가슴에 안고 간다.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어머니께 점심을 사 드리러 주간보호센터로 향했다.
주간보호센터는 읍내에 있어 차로 한 이십여분을 가야 한다. 구순을 넘기신 어머니가 그나마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며 노후를 보내서 다행이다. 구순을 넘기셨는데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가시지 않을 만큼 건강하시다.
주간보호센터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다른 분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센터를 관리하는 분에게 어머니에게 점심을 사드리러 왔다고 하자 그곳에 모이신 분들이 어머니에게 박수를 쳐 주신다.
센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겉옷을 입혀 인근 식당으로 이동했다. 어머니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자 어머니는 그만 고향집에 가시겠다고 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너네 두 딸은 결혼했느냐?", "너는 지금 어디에 다니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똑같은 것을 물으신다.
어머니는 약간 오래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시고 최근의 일만 기억하신다. 어머니 물음에 "큰 딸은 결혼해서 손주까지 낳았다.", " 난 지금 퇴직해서 서울에 살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어머니와 고향집 안방에 앉아 있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안방 아랫목에 앉아 술 한상 내오라던 목소리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대필 편지를 써서 읽어주던 낭랑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하다.
오늘은 고향에 봄나물을 뜯으러 왔지만 봄나물은 뜯지 못했다. 그 대신 어머니와 옛 시절 이야기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며 지난 추억을 따러 왔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짓던 시절 어머니는 평소 자식에게 무언가를 내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하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이제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네."라며 아쉬운 마음으로 한숨을 짓는다.
내가 어머니에게 "이제 서울로 올라갈게요?"라는 말을 건네자 어머니는 걷는 것이 불편한데도 마중하기 위해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가녀린 손을 흔든다.
그리고는 "당신 걱정은 하지 말라." 하시며 내게 "네 몸 건강하게 잘 돌보고 가족들 잘 챙기며 살라."라고 웃으며 말씀을 건네니 고향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기만 하다.
나는 차의 창문을 내리고 "어머니! 주간보호센터에 잘 다니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어디 아프시면 전화 주세요?"라는 긴 여운의 인사말을 남기고 운전대를 돌려 고향의 동구를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