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육신을 버티며 살아간다지만, 그에 대한 답을 모르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에 고민만 깊어간다.
오늘은 글쓰기를 수강하러 가는 날이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필기도구를 챙겨 출발시간이 되어 손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구민회관까지는 걸어서 이십여분 거리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벗어나 교차로를 지나 건너편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그 단지 내에 갈지자로 자란 고목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무 둥치가 비바람에 흔들려 구부정하게 자라고 가치를 뻗어 가지 끝에 흰 눈송이처럼 꽃이 피었다. 나무껍질은 거무스레하고 모진 세월을 버텨낸 둥치와 가지에서 여유와 넉넉함이 엿보인다.
고목 옆에는 어린 유목이 바람에 흔들리며 자기도 꽃을 피웠노라고 손짓을 한다. 고목과 유목에 같은 꽃이 피었지만 이미지와 풍경은 사뭇 다르다.
고목에 핀 꽃은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배어나지만 어린 유목에 핀 꽃에서는 성장통에 겪는 흔들림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봄기운이 완연해지자 사방에서 꽃 잔치를 벌인다. 이쪽을 바라보면 노란 개나리꽃이 피었고, 저쪽을 바라보면 하얀 목련꽃이 솜사탕처럼 만개했다. 그리고 목련 옆에는 고목에 벚꽃과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겨우내 죽은 줄 알았던 고목에서 벚꽃과 매화꽃이 핀 모습이 아름답다. 나무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나뭇잎을 키워 열매를 맺고 결실을 맛보게 한다.
사람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나뭇잎을 키워 열매를 맺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자연에 베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나무가 베풀어 주는 행위만 바라볼 뿐이다.
사람도 가끔은 고목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며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과 나무가 다른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누가 더 참다운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눈의 시선이 자꾸만 나도 꽃이요 하고 손을 흔드는 작은 나무가 있는데도 고목에 핀 하얀 꽃으로 향한다. 고목이 꽃이 피기 전에는 고독하게 바라보이다 흰 꽃으로 화려하게 수를 놓으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주변에 나무마다 생명의 꽃잔치가 벌어지는데 구석진 곳에서 자라는 고목도 고운 자태로 꽃을 피웠다. 그러고 보면 나무는 참 공평한 삶을 살아간다. 나이가 든 고목이나 어린 유목이나 다 같이 꽃을 피워 계절에 흥취를 더하니 고목이 좋다 유목이 좋다 하는 것을 굳이 판별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도 나이 든 사람이 좋다 어린 사람이 좋다 하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고 살아온 시간만 서로 다를 뿐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사람이나 나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나이가 지긋이 들면 추레함보다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고목에 핀 꽃이 아름답듯이 나이가 들어 추레해지면 그것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사람도 생을 살아오면서 온갖 비바람에 시달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지만 고목처럼 여유롭고 은은하게 꽃을 피워야 인생이란 환희의 꽃이 피어난다.
고목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듯이 사람도 자신이 아름다운 인생을 꽃피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고목이나 사람이나 아름답게 바라봐주는 것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 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고목에 핀 꽃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나도 저들처럼 남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고목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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