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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나라나 Dec 21. 2021

누구나, 급똥

by 라나라나

 

 달 전 아이 유치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당시엔 한 자릿수로 잘 잡혀가던 싱가포르 확진자수가 기분 나쁘게 조금씩 늘어가던 때라 예민한 시기였다. 급한 일이 있어 혼자 한국을 방문했다가 돌아와 나 홀로 시설 격리를 하고 있었고, 신랑이 두 아이를 돌봐야만 했는데 아이 유치원은 문을 닫았고, 아이의 코로나 검사를 하기 위해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MOH(보건복지부)에서 통보가 왔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어서 가정방문 검사는 사라졌다.)


싱가포르 와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시간 약속이었는데 집안 수리 관련, 핸디맨과 약속을 잡으면 1시부터 5시, 보통 서너 시간 이런 식으로 잡는다. 최근에 자전거를 샀는데 배송 예상 시간이 9시부터 7시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 번 약속을 놓치면 또 얼마나 미뤄질지 모르니,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집에서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코로나 검사관 아저씨는 구체적인 시간도 없이 내일 방문하겠다고 했단다.

신랑과 아이는 편한 파자마도 못 입고 위아래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기다렸다.

나는 아침부터 수시로 전화를 하며 처음 콧구멍을 쑤시는 여섯 살 아이가 놀랄까 봐

"왔다 가셨어?" 재차 물었고.

"아니. 아직 안 왔어. "똑같은 말을 신랑과 계속 주고받았다.


코로나 관련 정부 기관의 핫라인은 통화 폭주로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큰 아이 등교와 관련해 궁금한 것도 컨펌받기 위해 질문 몇 가지도 준비해 놓은 상태라 더 애타게 기다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공무원도 파할 시간, 일곱 시가 넘어서 아이고 안 오려나 보다 했는데

그때 그분이 오셨다고 전화가 왔다.


"오빠. 어땠어? 뚜지 안 울었어? 질문은? 다 물어봤어?"

따발총처럼 내가 물어보자 신랑은 '잠시만' 하더니 하나씩 대답해주었다.


"응 다 받았어. 내일 결과 나온대.

근데 말이야.. 나 보자마자 대뜸 하시는 말이..."

제가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지 아십니까?


신세 한탄을 하시더란다.

얘기인즉슨 더운 여름나라에서 위생비닐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어기적 걸어 다니며 이집저집 자가격리 명령이 떨어진 곳들을 방문하다가 녹초가 되어 우리 집에 오셨다는 것이다.


"내가 질문하는 거엔 건성으로 대답하시고, 자기 잘 모른다고 핫라인으로 전화하라고 하드라."

"거기 전화 안 받는다고 말하지."

"말했지. 그래도 그냥 전화 다시 해보래."


그리고 계속 아침부터 몇 집을 돌았는지, 다크서클이 발끝까지 내려온 표정으로 생전 처음 보는 신랑을 붙잡고 오버 근무에 억울함이 터져 나오셨는지, 계속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뚜지는?"

"뚜지는 꿈쩍도 안 하고 씩씩하게 코 쑤셔도 가만히 있더라."


하루의 피곤함을 잔뜩 묻힌 지친 어른의 얼굴을 마주한 아이는 속 깊게도 아픔을 참았나 보다 하면 부모의 말도 안 되는 콩깍지 발언이고, 아주 작은 개미도 무서워하면서 가끔 엉뚱한 포인트에서 비장한 구석이 있는데 코 쑤시기가 그중 하나였나 보다.


"그런데 갑자기 부탁이 있다고 하시드라."

"뭔데?"

 화장실 좀 써도 되겠습니까?

나는 완전 빵 터졌다.


"그래서 쓰라고 했어?"

"아 그럼 어떡해. 그렇게 힘들다고 다 죽어가는 사람이 화장실 한 번 쓰자는데, 근데 오래 쓰시더라."

"급똥이셨구나."


순간 내 머릿속은 재빠르게 온갖 확진 가능성이 있는 집들을 돌아다니신 분이 우리 집 화장실을 쓰셨다면,

혹시 바이러스를 다 묻혀오시지 않으셨을까 휙휙 돌아갔지만 올매나 급하셨으면,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부터 화장실이 급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집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현관문 밖에서 검사만 하고 가셔야 하는데, 막 밀고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셨을까.

민망한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어쩜 구구절절 본인의 힘든 상황 어필을 하셨는지도.

신랑이 물어보는 질문들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와 건성으로 대답하신 게 당연했겠구나 싶었다.


하긴 우리 부부가 워낙 급똥 체질이라 연애 때부터 알지도 못하는 건물에 뛰어들어

화장실을 다급하게 물어보고 얻어 똥 싼 적이 한두 번인가.

심지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사색이 되어 신랑이 운전대를 버리고 직원 유리창에 카드 대신 머리를 들이밀고 직원 화장실을 물은 적도 있고, 너무 급해 아이 기저귀를 들고 뒷좌석에서 대비를 한 적도 있으니 돌고도는 화장실 인심.. 베푸는 게 마땅하구나.


급똥의 추억은 아마 집집마다 하나씩은 다 있을 것이다.

그 위기를 어찌 넘겼는지, 못 넘겼는지는 추억이거나 은밀한 비밀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

다만 그런 작은 추억들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쪼매난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쯧쯧. 올매나 급했으면. 그 비닐옷을 힘들게 다 벗고 싸셨을꼬? 근데 락스는 콸콸 들이부어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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