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싱가포르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사계절이 여름이라 일 년 내내 수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싱가포르는 아마 천국이지 않을까 싶다.
싱가포르의 집 중 콘도라고 부르는 집들은 단지 안에 수영장이 있고, 콘도가 아닌 집이라도 다들 집 근처에 작은 워터파크나 수영장이 있어 공짜나 다름없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로컬 초등학교에서는 3학년 교과 과목 중 생존 수영이 있어서 학생들은 누구나 어릴 적부터 기본적인 수영을 배울 수 있다.
어렸을 때 강가에 놀러 갔다가 튜브를 타고 어른들 시야를 벗어나 둥둥 떠내려간 경험이 있는데 그 이후로 겁을 먹은 건지, 워낙 몸치에다 운동을 안 좋아해서 그런 건지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물놀이 갈 때마다 즐기지 못해 답답한 적도 많았다.
물개처럼 반들거리며 물속을 오가고 바다 수영을 하는 친구들을 모래사장에서 오도카니 앉아 바라보거나 발 닿는 곳에서만 튜브를 타고 동동거린 적이 많았다.
20대 때 안 되겠다 물 공포증이라도 이겨내자 싶어서 직장을 다니며 새벽 수영을 끊었다. 모두가 쌩얼에 수영모를 쓰니 나이가 어린지 많은지 구분이 잘 안 되었다. 커플들만 대략 20대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열 명 정도로 구성된 기초반이었는데 가만 보니 다들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인데 그렇게 잘할 수 없지. 허우적대는 사람은 오직 둘, 피부가 새하얀 남학생과 나뿐이었다.
동작을 배우고 출발! 하면 다들 줄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때 인생에서 가장 적은 몸무게를 기록하고 있어서 잘 뜰 줄 알았는데 몸무게와 뜨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남학생과 나만 꼬르륵 거리며 코에 물 들어갔어요! 귀에도요! 몸이 안 떠요! 를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두 달간의 사투 끝에 드디어 내 몸뚱이는 떴고 고개를 들고 호흡을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수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배영도 잠시 할 수 있었다. 다음 달 모두 윗반으로 등록할 거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선생님 저는 기본반 한 번 더 들을래요.'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며 제발 그냥 좀 윗반으로 올라가라고 하셨다. 가르치시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 보다.
마지막 날 젖은 머리를 털고 나오는데 신발장에서 그 남학생을 마주쳤다. 수모를 벗고 옷을 입으니 그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데 번듯한 30대 초반의 직장인 같으셨다.
' 아이고 수업 중에 학생~. 하고 실수할 뻔했구먼.'
속으로 깜짝 놀랐다.
수영장에서는 나와 같이 어리바리한 꼴등반 소속이셨지만 회사에서는 끝내주게 일 잘하는 팀장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심하게 변신한 사람이 한 분 더 계셨으니 바로 수영 선생님이셨다.
세상에, 수영장에서는 번쩍거리는 최신상 수영복을 입고 근육맨 자태를 뽐내며 수영장을 호령하는 황제 폐하 같았던 그분이 수모를 벗고 평복을 입으신 모습은 길거리 가다가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머리숱이 많이 없으셔서 수모를 썼을 때보다 더 나이들어보였고 루즈하게 늘어진 바지와 스포츠 가방은 왠지 깔끔한 느낌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참 달라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신 있는 영역에서는 정글의 맹수처럼 보이다가도,
나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구석에 쭈그리고 있기도 한다.
음 역시, 세상사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렇다면 수영장에서 과연 나는 어때 보였을까 순간 궁금했지만 출근 준비하느라 금세 잊어버렸다.
그 뒤로 수영에 조금 재미가 붙어 일요일마다 친구와 수영장에 놀러 갔다.
수영을 한 후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온탕이 있는 수영장이었는데 나이 드신 아저씨들 몇 분이 먼저 와 계셨다.
수모를 쓴 채로 덜덜 떨며 들어가려던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더니
" 중학생? "
우리는 둘 다 너무 웃기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갑자기 더 귀여운 목소리로
"뉘에뉘에" 하고 발만 담갔다가 그냥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에서 다시 내 몸을 훑어봤는데 그래.. 남학생이냐고 안 한 게 어디야..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에서 변신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중학생은 젖은 머리를 털고 립스틱을 살짝 바른 다음 뽕브라를 차고서야 드디어 아가씨가 되어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