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신랑과 연애할 때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옷차림이었다.
우리는 꽃피는 춘삼월에 만나 연애를 시작했는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그의 바지는 한결같았다.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우리가 이십 대 초반 커플 옷 입을 나이도 아니고 옷차림까지 이래라저래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일 끝나고 짧게 만나니 그런 것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욱 많기도 했다.
하지만 바지는 밑단도 낡아가고 곧 추워지는데 겨울에도 저 바지를 입을까 미리 상상만 해도 내가 한기가 들 지경이었다.
오빠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오빠. 그 바지는 어느 계절용이야?"
"어. 이거. 사계절용."
"아... 그런 옷도 있나..?"
"어. 이거 살 때 매장 아주머니가 사계절 다 입어도 된다고 그러시던데?"
그 아주머니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얼마나 급하게 대충 말하고 파셨길래, 순진하고 어수룩한 젊은이 하나 엄동설한에 얼어 죽일 뻔하셨습니다..
자기 몸이나 환경의 불편함에 대해 굉장히 둔감한 오빠는 곧이곧대로 믿으며 그 바지를 입고 몇 번의 겨울도 난 것이었다.
어느 날은,
"수란아~~" 환하게 웃으며 점점 다가오는데 목에 레이스가 달린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게 보였다.
하얀 티셔츠를 얼마나 빨아 입었길래 아니면 싸구려길래 목 주위 밴드가 쪼글쪼글 심하게 울어서
흡사 레이스로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티셔츠를 바지 안으로 집어넣고 그 위에 벨트를 차고 구두를 신으셨는데,
너무나 충격적인 패션에 당황한 나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땅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저기, 티셔츠 좀 밖으로 빼지.."
어느 날은 본 중 가장 깔끔하게 하얀 폴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사람이 달라 보였다.
누나들이 조언해줬나?
" 오빠 그 하얀 폴로셔츠 잘 어울린다. "
" 아? 이거 회사 단체티야. "
그러고 보니 소매와 등 쪽에 작게 회사 로고가 있었다.
그 뒤로 오빠는 회사 단체티만 입고 나를 만나러 왔다. 덩달아 주말 연장 근무하는 기분이었다.
더 가까워진 뒤로 오빠는 옷에 관련된 웃픈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내가 그렇게 옷을 못 입나? 내가 90년도에는 정말 한 패션 했는데 이상하네.
어느 날 회사 차장님이 겨울 파카를 입고 오셨는데 내가 입은 거랑 똑같은 거야.
그래서 동료들이 막 둘이 똑같다 했더니 기분 나빠하시며 그다음부터 다시는 안 입고 오시더라."
"결혼식이 있어서 양복을 급하게 새로 사서 수선을 맡겼더니 팔다리를 다 짧게 줄여놓은 거야. 한 벌뿐이라
어쩔 수 없이 입고 갔지. 여자 후배랑 같이 옆자리에 앉았는데 바짓단이 종아리까지 올라와 후배는 흘끔 흠칫 놀라고 나는 계속 끄집어 내리느라 혼났네."
우리는 아주 깔깔대고 웃었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런 어느 날 신랑이 오후에 시간을 내서 옷 좀 같이 골라달라고 했다.
친한 동생이 취직 면접을 보는데 형편이 좀 어려워서 양복 하나 해주고 싶다고 했다.
안타까운 사정이 있나 보다 싶어 흔쾌히 나갔는데 와... 그 동생은 키가 180이 훌쩍 넘어 보이고 얼굴은 뽀얗고 곱상했다.
무얼 입혀도 부티 간지가 주르르 날 얼굴이었다. 입고 나온 티셔츠도 좋은 스포츠 브랜드였다.
회사의 중요한 일을 마치고 급하게 온 오빠는 역시나 사계절 바지에 허름한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꼭 시골에서 상경한 형아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생 뒷바라지해주러 온 듯한 느낌이랄까..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옷을 사주었다.
그날 나는 심쿵했다.
그날따라 오빠의 후줄근한 사계절 바지조차도 멋있어 보였다면 거짓말이고,
초라한 행색 속 그의 럭셔리한 마음에 홀랑 마음을 뺏겨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