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온 큰 아이가 싱가포르 공립학교에 다니려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입학시험(AEIS)을 봐야 했다.
운 좋게 아이는 시험에 붙었지만 학교는 직접 선택할 수 없고 오직 지역만 선택 가능한데 일단 시험에 붙으면 정부가 랜덤으로 배정해주었다. 배정받은 공립학교는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자그마한, 소위 공부 좀 시킨다는 엄마들에게는 인기 없는 학교였다.
그런 학교일수록 중국계 싱가포리언 아이들은 많지 않고, 대부분 인도계나 인도네시아, 말레이 쪽 아이들이 많다. 전통 있고 유명한 학교들은 수업이 끝나면 입구부터 차들이 쭈욱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는데 처음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큰 아이의 학교 앞엔 열 대 정도의 차만 눈에 띄었고 그늘진 벤치 주위로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주로 저학년 아이들 엄마인 것 같았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비나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쉘터들이 주욱 연결되어 있는데 그 쉘터가 싱가포르의 HDB라 불리는 아파트들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루 한 차례 열대 지방의 스콜이 쏟아져도 운 좋으면 비 한 방울 안 맞고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게 해 놓은 싱가포르 정부의 배려 깊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이의 학교는 운 좋게도 후문이 아파트 단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처음 아이를 데리러 갈 땐, ' 반 친구도 알아야 하고 학부모도 알아야 하는데 '하고 혼자서 맘이 바빴다.
더구나 아이는 3학년 5월에 학교를 들어갔는데 학기가 시작되는 타이밍도 아닌 중간고사 기간이라서 조금 애매했다. 처음 픽업 가던 날, 그렇게 꾸민 건 아니고 그냥 치마를 입고 화장은 하던 대로 하고 (나의 화장은 5분도 안 걸리는 기초화장이다.) 양산을 쓰고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오마나, 나는, 기다리는 엄마들 사이에서 너무 튀었다. 이슬람 분들이 많으셔서 히잡을 쓰고 계셨고, 나머지 분들은 그냥 쪼리에 반바지, 화장기는 정말 일도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있으니 5분 화장이 풀 메이컵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혼자 좀 뻘쭘하게 서 있다가 웃으며 뛰어나오는 아이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벌써 친해진 아이들을 소개해주는데 어차피 정류장이 같은 방향이라 다 같이 걸어갔다. 그중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었다. 똑같은 빨간 가방을 메고 있는 도토리처럼 야물고 귀엽게 생긴 일란성 쌍둥이 남자아이들이었다. 엄마는 푸근한 인상이셨고 적극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시고 웃어주셨다.
"한국에서 온 거야?"
"응, 오늘이 첫날이야."
"반가워. 난 에이마야. 그리고 미얀마에서 왔어."
"어. 나는 수 란. 발음이 어렵지?"
"아 괜찮아. 어렵지 않아. 쑤 뤈 맞지?"
"어. 쑤 런 맞아. 쌍둥이들 너무 귀엽다."
"응 난 아들만 셋이야. 위에 형아 하나가 더 있어."
나보다 나이도 훨씬 위였지만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고 그 뒤로 픽업 타임에는 혼자 있는 날 위해 무리를 벗어나 말을 걸어주었다. 알고 보니 에이마는 인기녀였다. 경비 아저씨, 선생님, 학부모들 모두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내가 혹시라도 학교의 공지를 빠뜨리고 놓칠까 봐 매번 한국의 카톡 같은 왓츠앱으로 나를 챙겨주었다.
"쑤 롼, 영어 못한다고 기죽으면 안 돼."
"알겠어. 에이마."
"나도 십 년 전에 남편 따라 처음 왔을 때는 그랬어. 뉴스랑 신문 많이 봐."
"알겠어. 에이마. 근데 뉴스 어렵던데."
"괜찮아 괜찮아. 점점 들릴 거야. 라디오도 들어."
"알겠어. 에이마. "
내가 처음 운전을 하기 시작하던 때 몇 번 에이마와 쌍둥이를 태웠는데 주차를 잘 못하는 나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네주었다.
"쉬 런, 주차 못한다고 기죽지 마. 시간 걸려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당당하게 해."
"알겠어. 에이마."
늘 든든한 언니 같던 에이마는 분명 내 이름이 발음하기 쉽다 했지만, 난 어느 날은 쑤롼이 되었다가 쑤런이 되었다가 쉬런이 되었다. 방학 때 미얀마에 돌아가서도 미얀마의 유명한 곳들 사진을 보내준 덕분에 수도인 양곤의 거리, 남자도 여자도 싸롱이라는 긴 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들, 아름다운 금탑과 사원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 번은 겨울 방학에 사진이 왔는데 세 아이들이 모두 머리를 삭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의 신쀼(Shinpyu)라는 성인식 같은 것인데 신쀼의 뜻은 "승려가 되다"라고 한다. 미얀마 남자들은 일생에 한 번 승려가 되어 단기 출가를 경험해야 진정한 미얀마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한다. 친지들이 다 모이고, 정숙한 분위기에서 머리를 삭발한 세 아이들이 승려복을 입고 동네를 거닐며 축하받는 사진을 보내주었다.
방학이 끝나자 두 아이들은 이젠 알밤같이 토실해진 얼굴과 반지르르한 머리를 한 채 학교로 돌아왔다. 한국 같았으면 삭발한 친구를 놀리거나 이상하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워낙 다민족이 섞여 다문화를 이루고 사는 싱가포르에선 아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부턴가 에이마가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 큰 형아가 일찍 끝나는 날, 두 동생의 픽업을 오기도 하더니 그 후엔 쌍둥이들끼리 가는 날도 많아졌다. 궁금해서 왓츠앱으로 연락해보았다.
"에이마. 무슨 일 있니."
"쑤 뤈, 내가 좀 아파."
"어디가?"
"나 갱년기가 왔나 봐. 몸이 뜨겁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해서 화가 조절이 안돼."
"우리 만날까."
"나중에."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고 하굣길에 다시 나타난 에이마는 그간 고생한 흔적이 얼굴에 보였다.
"이제 괜찮아?"
"응. 나도 내가 낯설었어. 어느 날은 화가 너무 나서 못 참겠는 거야. 그래서 병원에 갔고, 지금은 호르몬제를 먹고 나서 많이 좋아졌어."
"아 어떡해. 진짜 고생 많았구나. 좋아져서 다행이다."
그 뒤로 코로나가 터지고, 학교는 락다운 되어서 작년부터 우리는 얼굴을 더 자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간간이 연락을 했다. 특히 2021년 올해는 미얀마의 쿠데타가 일어나서 가족을 두고 온 에이마는 더욱 힘들어했고 나 역시 신문에 연일 올라오는 미얀마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미얀마 사람들은 부드럽지만 강하니 잘 뭉쳐서 이겨낼 거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그 시절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회복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는지 잘 알기에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성숙한 민주주의가 싹트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제 아이들 학교가 달라져서 더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에이마는 새로운 학교가 낯선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손을 내밀며 싱가포르의 정착을 도울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친절은 전염성이 있다고 한다. 마치 웃음처럼.
아마 내 세포 어딘가에도 그녀의 친절함이 전염되어 앞으로 만날, 싱가포르가 낯선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