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이번 여름, 오랜만에 한국에 들렀을 때 제주 공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공항에 내리면 항상 아빠나 형부가 데리러 왔었는데 그날따라 아무도 없었다.
내 앞으로 줄이 꽤 길었는데 바닥에 그려진 하얀 줄을 따라 1번, 2번, 3번, 4번 택시는 속속들이 들어왔고 손님들을 날랐다.
생각보다 금방 차례가 돌아와서 마지막 4번 택시를 탈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캐리어가 두 개나 돼서 혹시 기사님이 싫어하실까 봐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덜컹 트렁크가 열렸고, 정리되어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캐리어 두 개를 간신히 밀어 넣었다.
"oo동 oo빌로 가주세요."
묵묵부답이었다.
빌라 이름이 비슷비슷한 동네라서 보통은 네비를 찍으시거나 다시 한번 물어보시는데 기사님은 그냥 출발하셨다.
공항에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기에, 혹시라도 길을 놓치시면 말씀드려야지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차가 좀 덥다는 걸 깨달았다.
기사님이 창문을 나지막이 내리고 에어컨은 송풍으로만 틀어놓은 채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덩치가 상당히 크셨는데 목 뒤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계셨다.
그리고 혼잣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어폰으로 통화하는 줄 알았다.
무심코 본 귀에는 이어폰이 없었고, 앞쪽 휴대폰에도 아무 신호가 없었다.
"아이씨 아이 진짜 아이씨 아이지지비비...."
알 수 없는 혼잣말인 듯 짜증인 듯 중얼거림이 들렸다.
난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낮이었다. 별일 없겠지.
앞쪽 기사님의 정보가 담긴 사진엔 생각보다 앳되보이는 젊은 덩치 있는 남자가 찍혀 있었고,
옆모습을 보니 동일인물은 맞는 것 같았다.
한 손은 운전대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은 불안하게 허벅지를 문질렀다가 때렸다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다. 중얼거림은 끝없이 들려왔다.
나는 무서워서 백미러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였다.
눈이 마주치면 어쩌지.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운전석 뒷좌석에 붙여놓은 글씨.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애완견을 데리고 탈 수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고, 기억에 남는 건 글씨체였다.
왼손으로 쓴 듯한 삐뚤빼뚤한 손글씨여서 나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우리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무서웠다.
마침 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수란아. 어디니. 거의 다 와가니."
"언니! "
난 무척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디냐고? 나 여기 방금 튼튼 병원 지났고, 이제 오분이면 도착할 거야. 형부도 있지? "
집에 있지도 않은 형부를 들먹였다.
"아니 없다고 했잖아. "
"어~알겠어. 형부랑 같이 나와. "
헛소리를 하고 끊었다.
점점 빌라 입구가 가까워지자 난 뛰어내릴 준비를 하며 수란아, 그래도 트렁크 짐은 챙겨야 한다. 정신줄 잡자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조금 외진 길에 있는데 그래서 좀 더 긴장되었다. 아이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기사님은 입구를 쓰윽 지나 곧장 직진하시는 것 아닌가. 그러면 더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데! 올 것이 왔구나. 내 이럴 줄 알았다. 직전까지 내 긴장을 풀어놓고 막판에 끌고 가는구나. 황급히 외쳤다.
"기... 기사님! 저기 입구.. 지났는데요! "
그 순간 차가 끼익 멈춰 섰다. 일차선이었는데 뒤차가 오는 건 확인은 하셨나 모르겠다.
차는 바로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과감히 하며 입구로 돌진했다.
나는 흔들리는 차에 머리 한쪽을 쿵 박으며 그래도 다행이야..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읊조리며 달달 떨며 지갑을 꺼냈다.
원래 더 안쪽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경비실이 있는 입구에서 여깁니다! 외치고 내렸다.
돈도 딱 만 원이 나와서 얼른 만 원짜리를 꺼내드렸다.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하고 서둘러 두 개의 짐을 꺼내고 살았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창문을 쓱 내리셨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젊고 앳된 얼굴에 틱이 있으신지 눈을 자꾸 깜박거리셨지만, 선한 눈빛이었다.
"잔 돈..있수다."
"아 아닌데요. 만원 딱 나왔는데요."
"내..내가..저..그... 폐 끼쳤수다.."
하시며 내 손에 400원을 떨어뜨려 주셨다.
입구에서 지나친 만큼을 나름 계산하셨나 보다.
택시는 떠났고,
그저 생각만으로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든 나는,
손바닥 위 짤랑거리는 400원을 꽉 쥐지도 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