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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나라나 Dec 27. 2021

택시 기사님  저희 집을 지나치셨는데요

by 라나라나

이번 여름, 오랜만에 한국에 들렀을 때 제주 공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공항에 내리면 항상 아빠나 형부가 데리러 왔었는데 그날따라 아무도 없었다.

내 앞으로 줄이 꽤 길었는데 바닥에 그려진 하얀 줄을 따라 1번, 2번, 3번, 4번 택시는 속속들이 들어왔고 손님들을 날랐다.

생각보다 금방 차례가 돌아와서 마지막 4번 택시를 탈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캐리어가 두 개나 돼서 혹시 기사님이 싫어하실까 봐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덜컹 트렁크가 열렸고, 정리되어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캐리어 두 개를 간신히 밀어 넣었다.


"oo동 oo빌로 가주세요."


묵묵부답이었다.

빌라 이름이 비슷비슷한 동네라서 보통은 네비를 찍으시거나 다시 한번 물어보시는데 기사님은 그냥 출발하셨다.

공항에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기에, 혹시라도 길을 놓치시면 말씀드려야지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차가 좀 덥다는 걸 깨달았다.

기사님이 창문을 나지막이 내리고 에어컨은 송풍으로만 틀어놓은 채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덩치가 상당히 크셨는데 목 뒤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계셨다.


그리고 혼잣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어폰으로 통화하는 줄 알았다.

무심코 본 귀에는 이어폰이 없었고, 앞쪽 휴대폰에도 아무 신호가 없었다.


"아이씨 아이 진짜 아이씨 아이지지비비...."


알 수 없는 혼잣말인 듯 짜증인 듯 중얼거림이 들렸다.

난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낮이었다. 별일 없겠지.

앞쪽 기사님의 정보가 담긴 사진엔 생각보다 앳되보이는 젊은 덩치 있는 남자가 찍혀 있었고,

옆모습을 보니 동일인물은 맞는 것 같았다.

한 손은 운전대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은 불안하게 허벅지를 문질렀다가 때렸다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다. 중얼거림은 끝없이 들려왔다.


나는 무서워서 백미러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였다.

눈이 마주치면 어쩌지.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운전석 뒷좌석에 붙여놓은 글씨.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애완견을 데리고 탈 수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고, 기억에 남는 건 글씨체였다.

왼손으로 쓴 듯한 삐뚤빼뚤한 손글씨여서 나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우리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무서웠다.

마침 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수란아. 어디니. 거의 다 와가니."

"언니! "

난 무척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디냐고? 나 여기 방금 튼튼 병원 지났고, 이제 오분이면 도착할 거야. 형부도 있지? "


집에 있지도 않은 형부를 들먹였다.


"아니 없다고 했잖아. "

"어~알겠어. 형부랑 같이 나와. "

헛소리를 하고 끊었다.


점점 빌라 입구가 가까워지자  뛰어내릴 준비를 하며 수란아, 그래도 트렁크 짐은 챙겨야 한다. 정신줄 잡자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조금 외진 길에 있는데 그래서   긴장되었다. 아이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기사님은 입구를 쓰윽 지나 곧장 직진하시는  아닌가. 그러면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데!  것이 왔구나.  이럴  알았다. 직전까지  긴장을 풀어놓고 막판에 끌고 가는구나. 황급히 외쳤다.


"기... 기사님! 저기 입구.. 지났는데요! "


그 순간 차가 끼익 멈춰 섰다. 일차선이었는데 뒤차가 오는 건 확인은 하셨나 모르겠다.

차는 바로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과감히 하며 입구로 돌진했다.

나는 흔들리는 차에 머리 한쪽을 쿵 박으며 그래도 다행이야..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읊조리며 달달 떨며 지갑을 꺼냈다.

원래 더 안쪽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경비실이 있는 입구에서 여깁니다! 외치고 내렸다.


돈도 딱 만 원이 나와서 얼른 만 원짜리를 꺼내드렸다.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하고 서둘러 두 개의 짐을 꺼내고 살았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창문을 쓱 내리셨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젊고 앳된 얼굴에 틱이 있으신지 눈을 자꾸 깜박거리셨지만, 선한 눈빛이었다.


"잔 돈..있수다."

"아 아닌데요. 만원 딱 나왔는데요."


"내..내가..저..그... 폐 끼쳤수다.."


하시며 내 손에 400원을 떨어뜨려 주셨다.

입구에서 지나친 만큼을 나름 계산하셨나 보다.


택시는 떠났고,

그저 생각만으로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든 나는,

손바닥 위 짤랑거리는 400원을 꽉 쥐지도 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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