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투박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앉아있을 힘도 없던 입덧 초기에 뭐든 도와주려고 애썼던 신랑에게 부탁했다가 실패한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머리를 묶는 거였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가 네 발로 기어 나오며 외쳤다.
오빠 내 머리 좀 묶어줘. 나 지금 토하러 가야 하거든.
가만있어봐. 하며 신랑은 무지 애를 썼지만, 머리카락을 쉽게 묶지 못했다.
아니 왜 이걸 못하지? 고무줄로 둘둘 묶으면 되는 것을.
뭐 일단 내 머리숱이 워낙 많기도 했지만, 머리를 한 손으로 한 올 한 올 챙겨 손바닥 위에 모으고 나면, 고무줄을 끼워 넣어야 하는데 신랑의 두 손이 자꾸 불협화음을 냈다. 고무줄을 끼워 넣는 그 새를 못 참고 모아둔 머리카락이 자꾸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고, 흩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주워 모아 고무줄 사이로 끼워 넣다가 미끄러지고의 무한 반복.
신나게 약 올리듯 도망 다니는 머리카락들을 어찌어찌 간신히 잡아다가 마무리 지었는데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을 묶고 고무줄은 거들뿐, 아주 볼썽사나운 형국이 되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입덧하느라 몰골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 거의 추노 수준이었으니 딱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긴 했다. 머리 감을 때 고무줄을 푸느라 닭털 뽑히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것 빼곤 괜찮았다.
어릴 적 방학 때 나는 발령 난 아빠를 따라서 잠시 낯선 도시에 엄마와 언니들도 없이 아빠와 단 둘이 산 적이 있다. 아빠는 내 머리를 묶어주셨겠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난 머리도 항상 길었고 풀고 다닌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빠도 이렇게 여러 번 피나는 연습 끝에 여자들에게는 코 후비기만큼이나 일상인 이 일들을 해내셨겠지.
여러 번 묶다보면 고무줄이 늘어나고 헐거워진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고무줄은 세탁기에서 꺼낼 때마다 양말 한 짝이 사라지는 법칙처럼 아무리 많이 사놓아도 매일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사실도 깨달으셨을 것이다.
신랑이 처음으로 딸의 머리를 묶어줄 때 당황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육아 분담이 꽤 잘 되어있는 부부라고 생각했는데 신랑이 한 번도 안 해본 것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 딸의 머리 묶어주기였다.
다섯 살 아이는 생의 주관이 확고했다. 양갈래 머리가 아니면 절대 하지 않았다. 예쁘고 단아하게 하나로 묶어놓으면 머리카락이 뒤통수에서 모여 하나로 떨어지는 게 싫다며 잡아 뜯었다. 발레리나처럼 틀어 올리는 똥머리도 거부했고 말 그대로 뒤통수엔 아무것도 붙어있으면 안 되었다. 아마 남자들은 모르는 불편함일 텐데 머리를 뒤통수 중간쯤 묶어놓으면 차를 타고 머리를 뒤로 기댈 때 불편하다. 묶은 머리가 걸리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급해서 한 번씩 하나로 묶어주면 등원하는 짧은 10분간의 불편함을 못 견디고 앓는 개처럼 끙끙댔다.
드디어 신랑이 아이 머리를 묶어줄 기회가 생겼다. 내가 몸살이 나서 아파 드러누운 날이었다.
아빠 두 개로 묶어주세요.
어. 그래그래.
약 기운으로 제대로 눈도 못 떠서 가물거리는 아이의 뒷모습에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아이는 한쪽은 머리 뚜껑에, 한쪽은 귀 뒤쪽에 자리 잡은 기괴한 양갈래 머리를 하고 등원했다. 선생님이 많이 놀라셨는지 다시 잘 매만져 주셔서 집에 돌아올 때는 정상적인 아이로 돌아왔다.
혼자서 한국을 다녀오느라 한 달 넘게 집을 비웠을 때 신랑은 드디어 단련이 되었는지, 과한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머리끈 여섯 개를 이용해서 나름 멋을 부리기도 했다.(그러나 히드라 같았다.)
아빠의 손가락으로 빗은 듯한 굴곡이 거친 머릿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
정수리부터 지그재그로 갈 길 잃은 가르마,
하지만 그 뒷모습은 볼수록 정겨웠다.
아빠가 머리를 묶어주는 건 딸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엄마손과는 달리, 커다랗고 투박한 손길이 스슥 머리를 만져주던 느낌은 크고나서 문득문득 어느 순간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아빠가 망가지고 흐트러지지 않게 애써서 정성 들여 만져 준 것은,
내 머리뿐 아니라 내 어린 시절도 함께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