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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나라나 Apr 08. 2022

"왜 하필" vs "이만해서 다행이야"



어제 신랑이 갑자기 고기를 사 온다는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이지? 늘 장은 내가 보기 때문에 갸우뚱했지만, 직장 동료가 저렴한 로컬 정육점을 알려줬나 보다 싶어 더는 묻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신랑의 손엔 마트에서 산 게 확실히 아닌 듯 싱가포르 시장인 웻마켓에서 볼 수 있는 다홍색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고 그 안에는 부위를 알 수 없는 소고기 두 팩이 담겨 있었다.

가격을 보니 현지 마트보다는 조금 저렴했다. 그렇다면 입구에서부터 환하게 웃으며 봉지를 흔들어댔을 텐데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오빠 싸게 잘 샀네. 근데 왜 이렇게 심각해."

"저기.. 이거 사러 처음 가보는 곳 갔다가 주차장 기둥을 못 보고 차 긁었다.. 아. 왜 하필 거기에 기둥이.."

참고로 우리 차는 산 지 일 년밖에 안 된 새 차였고, 그 일 년 동안 신랑은 자신의 애마인 새 차를 부인보다 더 아껴서 나에게 차 키를 잘 넘기지도 않았다..

'아이고.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냥 하던 대로 할 것이지..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고를 쳐..'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잔소리를 참았지만 내 잿빛 얼굴과 눈빛은 이미 그에게 마음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신랑이 차를 안 긁었으면,

"와. 역시 맨날 사던 것만 사면 안 되고 새로운 걸 시도해봐야 해. 어머 너무 싸게 잘 샀다." 했겠지.

분명 '새로운 시도'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은 처음 시작이 설렘과 도전과 용기라는 똑같은 마음인데 결과에 따라 칭찬 아니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게 먹자며 고기를 구웠는데 세상에, 고기 맛에 깜짝 놀랐다. 다시는 안 사 먹을 누린내가 진동했다.

검은 밤처럼 어두워진 신랑의 얼굴에 순간 한 줄기 반짝이는 희망이 비쳤다.

"괜찮아."

"뭐가? "

" 나 이번에 차 보험 들 때 자차도 들었고, 또 사고가 나도 한 번은 봐줘서 보험료 안 오르는 그걸로 해놨어."

얼굴에 드리웠던 밤의 장막이 서서히 거치며

". 보험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는데  너무 잘한  같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로 시작했다가 로 나름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한 사람의 기쁜 눈과 마주쳤다.

"진짜 잘했네..."


좀 전에 오미크론의 거센 물결 속에서 아직까지 무사히 버티고 계신 한국의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그래도.. 오미크론 걸리면 십만 원 준다더라. "

엄마의 무심한 듯 덧붙이는 이야기 속에 혹시 걸리더라도 좋은 점은 있어.라는 뉘앙스를 느꼈다.

나쁜 상황이 찾아와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긍정적인 하나의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내려고 버텨오신 칠십 년 넘는 세월의 비법일 것이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국내에서 겪지 못할 힘든 일들이 더 자주 생겼다. 그럼에도 그 시기들을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족이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긍정적이지 않으면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최대한 좋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버텨온 것 같다.

이제 마흔을 넘어 인생의 후반전으로 갈수록  빈도수가 잦게 빵빵 터지는 사건 사고의 지뢰밭에서 긍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사고처리를 하고 수습하며 상처를 감싸는  점점 익숙해지는 듯하다. 

아픈  나이 들어도 똑같이 쓰리고 아프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주렁주렁 달린 가족들이 있으니, 주섬주섬 툭툭 털고 일어난다. 상처를 움켜쥐고 둘둘 동여 메고 일어난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

"이만해서 다행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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