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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Jul 06. 2022

월량대표아적심

혼자 살기로 했다(14)

당신은 분명 좋아할 거예요.


알고는 있었지만,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두고 누군가는 도박의 심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감탄이 나왔다.


어느 날 내 유튜브에 오혁이 부른 ‘월량대표아적심’이라는 영상이 떴다. 확실히 인디밴드 음악을 과장 없이 좀 많이 듣기는 했다. 폴 김, 검정치마, 나이트 오프 등을 듣다 보니 존박이 취중에 부른 빗속에서를 추천받기도 했었다.


‘월량대표아적심’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


오혁이 월량대표아적심을 부른 2분짜리 영상의 출처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이었다. 기타 소리에 오로지 오혁의 목소리만 섞인 이 짧은 영상을 난 수십 번 돌려보고 돌려보았다. 그러다가 1시간짜리를 틀어놓고 글을 썼다. 가사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들을 때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대만 노래에 난 중독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인정했다.

“유튜브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구나.”


며칠 후 이번엔 ‘장국영’의 월량대표아적심 영상이 자꾸 눈에 띄었다.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죽은 이 홍콩배우의 월량대표아적심을 또 들었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옛스러운 연주와 플로우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 목소리가 좋아서, 또 잘생긴 얼굴에 감탄하며 계속 들었다. 그다음 알게 되었다. 이 달콤한 사랑노래가 꽤 오랫동안 중국어권 사회에서 사랑받아온 노래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또 듣다 보니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아이유의 ‘밤편지’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나는 여름밤이 깊어지면 동네 산책을 가끔 한다. 빛이 점점 줄어들고 어슴푸레한 시간, 혼자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하늘을 보곤 한다.

오랜 습관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걷던 거리, 앉았던 벤치, 그 나무 아래서 노래를 듣는다. 그때마다 자주 듣는 노래가 아이유의 ‘밤편지’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밤편지에서 사랑을 대신한 빛은 ‘반딧불’이다.

사랑을 이제 막 시작한 연인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반딧불을 보낸다고 말한다.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고, 너무 밝은 불빛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반딧불로 말이다.


월량대표아적심의 연인들은 어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해?”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


난 그때서야 이 노래가 달콤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곧 헤어질 것 같은 연인들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해달라는 노래, 당신의 사랑이 진짜인지 불안한 연인들의 노래였다.


달은 빛나는 별이 아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일 뿐이다. 그래서 매달 달빛은 바뀐다. 아니 매일 바뀐다. 크기도 바뀌고 모양도 바뀌고 뜨는 위치도 바뀐다.


줄리엣은

‘달에 대고 맹세하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도 저 달처럼 변덕스러울까 봐 두려워요.’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일까? 달이라는 건 왠지 ‘네가 빛나면 나도 빛나고, 네가 빛나지 않으면 나도 빛나지 않는다.’라는 상대적인 사랑 같다.




생각해 보면 사랑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어느 날은 반달이 되고, 어느 날은 보름달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어째서 너의 사랑이 초승달만 하냐고 묻는다면 지구에 가려져서 태양의 빛이 그만큼밖에 오지 않았으니 초승달인 거다. 당신의 사랑이 그만큼 밖에 나에게 오지 않았으니 나는 그만큼만 빛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사랑이냐고 의문을 갖는다면,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위대하지 않다. 사랑이 만능 치료약은 아니다.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는 창문 같은 게 사랑이다. 위대한 것은 사랑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창문의 먼지를 매일 닦아내려는 그 마음이다. 자꾸만 작아지는 마음, 자꾸만 변해가는 마음을 보듬어서 지켜내는 그 노력 말이다.


반딧불은 언제든지 다른 창문으로 날아갈 수 있고, 달빛은 일식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반딧불을 보내는 마음이, 달빛으로 마음을 전하려는 용기가 아름답다.


어두운 벤치에 앉아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는 여름이 깊을수록 나뭇잎이 빽빽해져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놓인 가로등 불빛 덕분에 길이 보였고 나무들이 보였다. 언제나 똑같은 불빛이 아닌가. 줄어들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가로등 불빛. 하지만 누구도 사랑을 가로등 불빛에 비유하지 않는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 높이 뜬 달을 사진으로 찍었다. 가로등 불빛만큼도 빛나지 않는 달빛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자꾸만 변하는 달빛보다 사람의 마음을 대신할 만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것은 완벽이 아닌 불완전한 것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불완전한 것, 싸우고 질투하고 실망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 글쓰기가 나에게 그렇다. 어느 날은 실망스럽고 어느 날은 행복하고. 헤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나의 자격을 의심한다. 그럼에도 지켜내려는 노력이 있기에 아직 빛나고 있다. 그것이 초승달이라고 해도.


“당신은 이것을 반드시 좋아할 거예요.”

유튜브가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내 취향이 고집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나에 몰입하고, 보던 것만 보려 한 편향된 취향 때문이다. 취향이야 말로 하늘에 뜬 달처럼 조금 변덕스러워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 듣고 싶은 음악은 ‘조성진’이 연주한 드뷔시의 ‘달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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