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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Jul 14. 2022

복이 많으세요

혼자 살기로 했다(15)


왼손에는 양산을 든다. 오른손은 핸드폰을 들고 눈을 떼지 않는다. 주로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으며

다가오지 마세요.


라는 비장한 분위기를 만들어 본다. 그럼에도 늘 걷던 그 길을 걷다 보면 꼭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에 복이 많으세요.”

“조상이 도와주고 싶어 해요.”


아줌마 세 명이 우르르 다가와 나를 둘러싸고 어느새 귀에 박힌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양산을 가능한 가장 낮게 내려서 얼굴이 안 보이도록 하고, 이리저리 몸을 돌려 그들에게서 빠져나왔다. 빠르게 걷는 내 뒤로 세 아줌마가 끈질기게 쫓아오며 계속 말했다.


“조상께 기도를 해야 그 복 다 받을 수 있어요.”


한두 번이 아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그 길을 걸을 때면 한 번은 꼭 그 복 무리들을 만난다. 예전에는 내 겉모습에 무슨 특징이 있나, 꽤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혼자 걷고 있는 사람’이 그들의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경험치가 생겨, 복 무리들이 저 멀리서 보이면 핸드폰을 보며 최대한 빠르게 지나갔다. 이젠 그들의 목표물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쯤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다.




“인천에 처음 왔거든요. 갈만한 곳이 어디예요?”


20대의 두 여자가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나한테 다가와 물었다. 의아하긴 했다. 핸드폰으로 찾으면 자세히 나올 텐데 왜 묻나 싶었다. 친구끼리 여행 왔나 보다 생각하며 월미도와 차이나타운을 추천해주었다. 그런데 역 쪽이 아닌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를 따라왔다.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복이 많은 얼굴이세요.”


충격이었다. 이런 식으로 낚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녀들을 피해서 도망쳤다. 이유가 있다. 그렇게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도망치는 이유.




대학생일 때였다. 생각해 보니 그 복의 무리는 꽤 오랫동안 활동해온 직업인들인 것 같다. 그때도 여름이었고, 현관문을 열고 발을 친 채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설마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사람들이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때였다.


“물 한 잔만 먹고 갈 수 있을까요?”

현관문 앞에 30대의 남자 한 명과 20대의 여자 두 명이 서있었다. 물 한 잔이라는데 야멸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물을 주었더니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조상복이 많습니다. 복은 많은데 조상이 업을 쌓아 복을 못 받네요. 조상을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공포가 밀려왔다. 집에는 나 혼자였고, 그들은 세 명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런 거 믿지 않는다고 나가 달라고 했다.


“저희가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을 드렸는데 그냥 가라고 하시면 안 되죠.”


나는 그 순간 결정해야 했다. 경찰을 부를까? 그럼 끝날까? 그들은 내 집도 알고 내 얼굴도 안다. 남의 집에 이렇게 불쑥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인데, 다른 어떤 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국 그들에게 고생하셨다고 수고하시라고 돈 2만 원을 주고 집에서 내보냈다.



혼자라는 것은 이토록 위험하다. 어느 상황에 표적이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곁을 내주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보다 경계가 더 커졌다.


익숙한 것은 안전하다. 익숙한 것에는 상처받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모든 익숙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자주 가는 마트가 있고, 자주 가는 커피숍이 있고, 자주 가는 편의점이 있어 안심한다. 하지만 반대로 잃어버린 것도 있다.


잃어가는 것은 감정이다.


두려움은 나를 양산 안에 가두고, 핸드폰을 방패 삼아서 항상 경계 태세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혼자이니까. 익숙한 것에 숨은 채, 익숙한 감정만이 남아 가고 있다. 그렇게 안전한 감정만이 남는다면 내가 점점 잃어가는 감정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는 이유는 감정의 파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도에는 상처와 실망이라는 골짜기도 있고, 환희와 격정이라는 파고의 마루도 존재한다. 확실한 건 골이 없다면 마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랐기 때문에 두렵고, 그로 인해 부끄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그 감정을 잃기 싫다. 행복한 이유로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존재하고 싶다.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나의 감정이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기 싫어 경계하다 보면 나는 반쪽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쁘다면, 그것이 온전한 나다.


때때로 만족하고, 때때로 불안한 감정에 휩싸이는 내가 진짜 나다. 나는 때때로 나를 비난하고, 나여서 다행일 때도 있다. 충분하다. 많은 행복에 무덤덤해지기보다 때때로의 행복에 진심으로 기쁘고 싶다.


여름이 깊어지고 있다. 어느 날은 비가 쏟아지고, 어느 날은 뙤약볕이다.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주말이면 집을 나와 글을 쓰려고 커피숍에 갈 것이다. 그 길에 필요한 것은 양산과 휴대폰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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