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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Jul 29. 2022

여름휴가


이모는 전라도 광주에 살았다. 동생은 대전에 살았고, 나는 엄마와 인천에 살고 있었다.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지만, 삶은 녹녹지 않아 우린 자주 못 보고 살았다.

드디어 여름휴가를 받았다. 나는 엄마와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갔고, 거기서 여동생과 4살짜리 조카를 만나 KTX를 탔다.


우리는 기차 안에서 실컷 떠들고, 조카의 예쁜 짓에 환호성을 남발했다. KTX는 금세 광주의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는 5인용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에서 이모와 사촌 여동생이 내렸다.

갓난아기 때 보고 두 번째 보는 동생의 아들은 이모와 사촌동생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신기하게도 조카는 나보다 사촌 여동생을 더 닮았고, 그걸 아는지 조카도 나보다 사촌 이모를 더 좋아했다.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사촌 여동생이 예뻐졌다며 눈에서 꿀이 떨어졌고, 사촌 여동생은 조카가 너무 귀엽다며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이모가 운전하는 트럭은 광주에서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 있는 시장에서 커다란 수박과 복숭아와 옥수수를 샀다. 트럭 안은 어느새 옥수수의 달짝지근한 냄새로 가득 찼다.

옥수수를 다 먹고나니 긴 다리 아래 흐르는 강이 보였다. 그 너머로 언덕마다 녹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보이는 모든 언덕이 다 여름빛깔로 물 오른 녹차밭이었다.


“여기서는 녹차 먹인 삼겹살을 꼭 먹어야 해.”


이모는 꼭 먹어야 하는 것들을 꼭 먹는 사람이었다. 친척들이 모일 때면 이모는 아이스박스를 서너 개 들고 왔다. 그 안에는 벌교 꼬막이나 홍어회, 장어 등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녹차 먹은 삼겹살을 먹고 냉녹차를 마시고 녹차밭을 구경했다. 사촌 동생은 조카와 술래잡기를 했고, 난 동생과 산책을 했고, 사진을 찍었다. 그럴 때면 항상 이모나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이모는 여행 가이드를 했다면 분명 예약이 꽉 차는 인기 가이드가 됐을 것이다. 이모의 트럭은 우리를 보성에서 제일 큰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고, 우리는 반 강제로 쑥과 녹차가 잔뜩 우러난 물에서 목욕을 해야 했다.




노곤해질 대로 노곤해진 우리는 트럭에 실려서 이번엔 좀 멀리 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리산이었다.

어둠이 내려올 때쯤 우리는 지리산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낡은 트럭에 실린 우리는 울퉁불퉁한 길을 겨우겨우 지나서 민박집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었고, 우리는 지리산 모기한테 물려가면서 잠을 잤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발등이 간지럽다.


그다음 날은 각자 자유였다. 엄마는 이모와 산책길을 걸으며 유명한 소나무를 보러 갔고, 여동생은 뒤늦게 합류한 제부에게 밥을 챙겨주느라 바빴다. 사촌 여동생은 조카의 사진을 찍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

지리산에서 사촌동생이 찍은 조카


나는 민박집 근처의 계곡으로 가서 혼자 여름의 지리산을 구경했다. 지리산은 여름을 토해내고 있었고, 초록의 숨은 계곡물에 녹아내렸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새소리와 매미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에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완벽한 쉼표였다.


우리는 지리산에서 무등산 수박과 복숭아를 먹었고, 산채 비빔밥을 먹었다. 밤이 되자 빛은 사라지고 눈앞은 깜깜한 어둠 그 자체였다. 이모는 우리를 모두 불러냈다.


“지리산까지 왔는데 계곡에 들어가 봐야지.”


이모는 엄마를 끌고 계곡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사촌 여동생은 물에 발만 담갔고, 나는 손전등을 들고 엄마와 이모를 비춰주었다. 엄마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음날 우리의 여행은 끝났다. 지리산을 떠나 제부의 차를 타고 대전으로 와서 고속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4살짜리 조카는 사촌 이모와 헤어지는 것을 알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생생하지만 오래된 기억이다.


어제 학원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휴가 첫날 나는 요양원에 전화를 해서 엄마와의 비대면 면회를 신청했다. 저녁에는 집에서 열무김치를 담갔고, 친구들과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남은 휴가는 영화를 보고, 학원 아이들의 시를 읽을 예정이다. 약 180편 정도.


여행 계획은 없다.


지리산 여행 몇 년 후 사촌 여동생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딸이 떠난 후 지치고 지쳐가던 이모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는 이제 여행을 할 수 없다.

나는 너무나 완벽했던 여행을 경험했다. 그런 여행은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때의 그 사람들이 이젠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웃고 행복한 날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는 없다. 다음에도 없다. 지금 이 순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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