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보호자님.
어머님께서 확진되셨어요.
아침 일찍 신나서 무화과를 손질하고 있을 때,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의 코로나 확진 소식이었다. 3년 동안 무사히 넘어가나 했는데, 기어이 앓고 가는구나 하고 멍했다가 무화과 손질을 마저 했다.
엄마는 무화과를 좋아한다. 하지만 8월에서 9월 잠깐 밖에 드릴 수 없는 과일이다. 나는 드디어 무화과를 샀다고 좋아했는데, 그 드디어가 또 다른 드디어가 돼버렸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운 채 집을 나섰다.
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요양원에 도착하자 구름이 점점 더 두꺼워지는 게 보였다. 한 곳으로 모이면서 검은빛이 짙어지더니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필 우산을 챙기지 못한 것을 탓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요양원 앞에는 구급차 한 대가 서있었고, 할머니 한 분이 이동 침대에 누워 구급차를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구급차가 나가자, 배웅하던 복지사가 다가왔다. 나는 들고 온 홍삼과 무화과를 복지사에게 전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늘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는데, 오늘은 조심스레 한 마디 덧붙였다.
“엄마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요. 걱정돼서요.”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빗방울이 조금 커져 이젠 옷에 물방울무늬를 냈다. 다행히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트를 펼쳐놓고, 커피를 마시며 몇 주째 쓰던 것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금방 올 줄 알았던 문자는 소식이 없었다. 초조하게 휴대폰만 들었다 놨다 했다. 시선은 자꾸만 창밖을 향했다. 방음창을 뚫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산을 사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며 써놓은 것들을 정리하다가 또 핸드폰을 보고 또 창 밖을 보았다. 집에 갈 때쯤 카페에서 나와 다이소로 가려고 했는데, 비는 멈춰 있었다.
15분 정도의 거리라서 난 우산을 사지 않기로 했다. 혼자 사는 집에 이미 우산이 5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회색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나마 지하상가로 들어가 물기 섞인 바람의 방해 없이 집 근처에 도착했다.
지하상가를 나오자 다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도 어두웠다. ‘우산을 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우산을 사기 위해 근처 마트로 뛰었다. 10초도 안 되는 사이 손등과 팔뚝이 축축해졌다.
마트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 눈은 자꾸 분홍색 복숭아들 사이의 푸릇한 초록 사과로 향했다. 결국 우산을 사는 대신 청사과를 산 후 마트 밖으로 나왔다.
‘장난 하나?’
마트 입구로 나오니 비는 또 멈춰 있었다. 삼켜버릴 것 같은 빗소리도 멈추고, 공기 중에 작은 빗방울이 날아다닐 뿐이었다. 이쯤 되니 영화 트루먼 쇼에서 나온 폭풍을 불게 한 버튼이 떠올랐다.
그냥 갈까?
편의점에서 우산을 살까?
나는 트루먼이 된 기분이었다.
집까지는 약 200미터. 걸어가면 5분 정도.
설마 그 5분 사이에 조금 전과 같은 폭우가 쏟아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산 없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만 잘 받으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한 손에 우산 대신 사과 봉투를 들고 빠르게 걸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쏴아아!!!’
연출자가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나무들이 잔뜩 솟은 산책길로 들어서는데 순식간에 비가 쏟아졌다. 장난 같기도 하고 심술 같기도 했다.
1분 만에 옷이 다 젖어버리고, 머리까지 축축해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쫄딱 젖어있었다.
‘카톡!’
그때 핸드폰에서 카톡 알림음이 들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열어보니 복지사가 보낸 사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무화과를 먹고 있는 엄마는 건강해 보였다. 사진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게 사는 거지.
나는 또 언제든지 우산이 없는 날을 만날 것이다.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질 때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결정으로 오늘처럼 쫄딱 젖어버릴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우산이 없다고 옷이 젖는 것을 두려워하진 않을 것이다. 비에 쫄딱 젖는다면, 샤워를 하고 선풍기로 머리를 말리며 청사과를 먹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