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끝에 2층의 단독주택이 하나 있다. 오랫동안 빈집이었던 탓에 낡고 지저분해서 눈길을 주지 않던 집이었다. 그 집이 눈에 점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란색으로 벽을 칠했네.”
“능소화가 피었네.”
그러다 주홍빛 전구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고, 부러워졌다.
“참 즐겁게 사는구나.”
담 하나 너머에는 잡초로 가득한 공터였다. 제멋대로 자라는 잡초들이 여름을 핑계 삼아 무성했고, 그 위는 거미줄과 먼지가 그물처럼 던져져 있었다.
그런 동네였다. 창문을 열어놓지 않고, 대문을 열어놓지 않고 각자 사는 동네. 각자의 집 위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그물처럼 얹어져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하고 별 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동네였다.
노란 집만 달랐다. 여름에 만나는 크리스마스 같았다. 방울 소리와 캐럴이 들리고, 문을 열면 따뜻한 코코아 냄새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집이었다.
나는 반짝거리는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도둑처럼 그 집을 드나든 적이 있다. 엄마와 엄마 친구는 그 집 옥상에서 고추를 말렸고, 붉은 고추가 바짝 마를 동안 나는 엄마 심부름으로 사람 없는 집을 드나들어야 했다.
“비 온다. 가서 비닐 덮고 와.”
“그 집 귀신 나오게 생겼어.”
내가 본 그 집은 폐가를 넘어 흉가였다. 마당엔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오고, 버려진 가구와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집이었다. 비 오는 날 계단을 올라갈 때면 어둠 속에서 손이 나와 발목을 잡을 것 같았다.
사람이 없고 있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 걸까?
귀신이 나올 것 같던 집은 너무너무 행복해 보이는 집으로 변해 있었다. 노란색 벽과 반짝이는 불빛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삶을 즐겁게 산다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늘 10미터쯤 떨어져서 본 풍경이었다.
10미터 전까지 그 집을 바라보며 걷다가 딱 10미터 앞에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추석이 가까워지며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조금씩 차오르는 반달을 보며 걷다 보니 그 노란 집 근처였다. 나는 그 반짝이는 집이 궁금해졌다.
“음?”
“어라?”
노란 집은 내가 상상했던 집이 아니었다. 가족이 즐겁게 사는 집이 아니라 손님을 기다리는 커피숍이었다. 가족을 위해 켜놓았다고 생각한 반짝이는 전등은 커피숍 간판이었다.
나는 반짝이는 불빛만 보았지,
실체는 보려 하지 않았다.
내 눈이 문제였다. 책과 핸드폰, 노트북에 익숙한 내 눈은 밤에 취약했다.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것은 시력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궁금했지만 가까이 가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딱 10미터 거리에서 짐작만 했다.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반짝거림이 마냥 좋아 보였는데,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착각들 속에 살고 있을까?
어둠 속에서 멀리 떨어진 채 바라본다면 어떤 것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눈까지 나쁘다면 착각은 훨씬 더 깊어진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려고도 않는다면 멀리서 본 것이 진실이라 확신하고, 그 확신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과 10미터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살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에어포켓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관계라고 믿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불쑥 알게 되는 진실들이 있다. 자신만만해 보였던 학생이 사실은 왕따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매일이 행복할 것 같은 친구가 사실은 꽤 지쳐있다는 것.
하지만 불쑥 알게 된 진실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기에 아는 척 참견하지 않는다. 위로도 방법도 함부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실 무엇이 정답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가끔 10 미터를 9미터로 줄일 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단 1미터라도,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다른 풍경을 보게 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