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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Oct 04. 2022

매직 아워 magic hour

학원 일이 끝나고 퇴근할 때, 문을 열고 나오며 계절을 체감한다. 캄캄해진 거리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 겨울이구나.’하며 장갑을 꺼낸다.

벚꽃잎이 떨어진 학원 앞의 거리를 보며 봄을 만나고, 문을 여는 순간 확 밀려드는 열기와 습기에 여름을 느낀다.  


가을은 조금 다르다. 덥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공기. 아직 낙엽이 떨어지지 않은 길에 주황빛 노을이 먼저 내려앉는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스며든 태양의 작별인사 때문인지 겨울보다 더 고요한 거리.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기에, 아직 더 가야 하는지 이제 멈출 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마법의 시간. 가을은 그렇게 매직 아워와 함께 다가온다.



저기 어디쯤 불타고 있구나.


그리고 곧 저물어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하루도 같은 하늘은 없듯이 하루도 같은 날은 없는데, 나는 하나의 시간에 갇혀있다. 신호등의 빨간불 앞에 멈춰서는 거다. 멈추면 자꾸 그날로 돌아간다. 단 둘이 그 나무 아래, 그 벤치에 앉아있던 시간으로.


“엄마, 그만 들어갈까?”

“너나 들어가.”

“아니야. 같이 있을게.”


벤치에 앉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하나 둘 일어나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앉아있었다. 엄마는 모자를 벗어 접었다가 폈다가 손에 잡힌 실을 손톱으로 긁다가 잡아 뽑으려 한다. 모자를 다시 씌워주면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러다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왜 쳐다봐요?’라고 톡 쏘며 싸우려들었다. 나는 얼른 엄마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다.


“엄마, 노래 들을까?”


엄마의 귀에 이어폰을 끼워주면 엄마는 노래에 빠져 다시 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디를 보는 걸까? 나는 그곳이 어딘 지 몰라 그저 하늘을 보았다. 고개를 들면 나뭇잎 사이사이에 맺힌 빛의 조각들이 투두둑 빗방울처럼 떨어질 것만 같다.


그리고 매직 아워가 찾아온다. 서쪽의 하늘이 분홍빛과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 창문들이 온통 붉은빛의 색유리로 변해가는 시간.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 나인지 내가 아닌지 내가 누군지 정의 내릴 수 없는 순간. 그로 인해서 나를 원망하고 나를 미워하게 되는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 오직 함께 한 기억만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새겨진다.


“엄마, 이제 들어가자.”

“왜 자꾸 들어가재. 너나 들어가.”

“알았어. 조금 더 있자.”



벌겋게 타오르던 하늘은 모든 불들이 그렇듯 사그라든다. 불길은 작아지고, 줄어들고, 점점 사라져 없어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가로등이 동시에 켜지고 벤치 앞에 그림자는 엄마와 나 둘뿐이다.


가로등 불빛으로는 밝힐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또 천천히 시간이 흐른다. 길에 사람은 없다. 멀리 보이는 도로에 차가 지나갈 뿐이다. 전조등을 켠 차들이 신호를 받고 좌회전을 한다. 신호가 바뀌면 멈췄다가 다시 줄지어 좌회전을 한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엄마와 나뿐이다. 빨간불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고,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다는 생각은 확신이 되고 절망이 된다.


“너무 늦었다. 이제 집에 가자.”

“이렇게 살아서 뭐하니?”


어둠이 깊어져 옆에 앉은 엄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바람은 어둠 속에서 더욱 서늘했다. 다행이었다. 덕분에 내 얼굴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도 없었고, 나도 없었다. 우리 앞에는 빨간불이 켜있었고, 오직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학원이 끝나고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문을 열고 나왔다. 횡단보도 앞에 모인 아이들은 친구들과 모여 비로소 아이처럼 떠들어댄다.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몇 시간 동안 꺼둔 핸드폰을 보느라 정신없었다.


“와! 하늘 진짜 예쁘다.”


고개를 돌리니 하늘이 주황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집이 가까워질 즈음 마법의 시간은 지나, 어둠이 앉은 그 벤치를 지나간다.

매일 밤 그 벤치에 앉아 길을 보던 엄마는 이제 요양원에서 하얀 벽만 바라보게 되었다. 빨간불은 파란불로 바뀌었고, 우리는 더 이상 그 벤치에 나란히 앉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는 여기에 있고, 그녀는 여기에 없다고 시간을 탓한다.


노을 지고 있는 하늘을 사진으로 남겼다. 무엇을 기록하고 싶은 걸까? 아름다웠지만 잊고 싶고, 잊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 마법 같아서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간에 갇힌 나를 사진 안에 또 한 번 가두어둔다. 혼자 갇혀있는 엄마가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은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지만 나도 당신처럼 갇혀있어요.’라고 핑계를 댄다.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간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내일 보자고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차를 타러 가는 길에 잠시 멈춰 뒤돌았다. 하늘은 주황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날처럼 또 남은 날들처럼.   가을은 그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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