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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Apr 27. 2022

독립서점에 사는 고양이

혼자 살기로 했다(4)

파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테이블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서 낮잠을 자다 눈을 떴다. 고양이는 귀찮은 듯 도망가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점의 책들을 다 읽은 것 마냥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만난 친구다.


학원 근처에 있는 이 골목을 아침 출근길에 가끔 지나간다. 그러다 어느 날 파란 대문에 눈이 머물렀다. 옆에는 한의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멋진 한의원이란 생각에 가까이 갔다가 나는 더 멋진 걸 발견하고야 말았다. 


파란색 대문 안에는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책방이 숨어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수많은 작가들의 책이 책장 가득 꽂혀있었다. 독립서점이다.


그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고양이였다.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 월넛 색깔의 테이블 위를 차지한 노란 고양이. 주인이 부르지 않으면 쳐다보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 없는 고양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없고 쉬고만 싶어 하는 표정이 너무나도 낯익어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책방은 정말 예쁘고 따뜻한 곳이었지만 평일의 오전 시간이라 손님 없었다. 혼자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기가 영 어색해지자, 내 입에서 이 말 저 말이 튀어나다.


귀여워...! 야옹아, 너 진짜 예쁘다.”

고양이는 크고 퉁퉁하고 털이 거칠어 보였. 살랑거리지 않았다.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내 입에선 쉴 새 없이 귀엽다는 말이 나왔다.


와!! 서점이 너무 예뻐요.”

난 책을 사러 온 손님의 태도가 아니었다. 신기한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이것저것 보기만 하고 사진만 찍었다. 주인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집이 어디 있어요?"

"시집은 조금밖에 없어요."

찾는 시집이 없었다. 더욱 초조해졌다. 뭔가 꼭 사고 싶었지만 필요 없는 것은 사기 싫었다. 사고 싶은 책이 눈에 띄지 않았는데도, 책들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나는 아름다운 책방 어떻게든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캐릭터 노트 같은 게 있나요?"

선물할만한 거라도 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노트는 팔지 않았다.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묻지도 않는 말을 떠들어댔다.

“이 근처 다니면서 봤는데, 책방인 줄 몰랐어요. 정말 너무 예뻐요."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 초조했던 나는 책 대신 수제 캐러멜을 샀다. 파란 문을 나설 때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또 친절한 말투로 인사했다.

자주 올 게요.


그게 한 달쯤 전이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할 때였고, 지금은 벚꽃이 다 져버렸다. 나는 시집을 대형 서점에서 샀고, 독립서점에 가지 않았다.


나의 말은 예의였을까? 가식이었을까?

거짓말을 능숙하게 해 버린 걸까? 아니면 당연히 해야 하는 말들을 적절한 순간에 한 걸까? 나의 말속에 거짓은 없었다. 그곳이 정말 예뻤고, 정말 좋았다. 쌀쌀맞고 귀엽지 않은 고양이었지만, 갈구하는 것이 없는 그 눈빛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나는 내내 찜찜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학원에서 일하면 상담전화라는 것을 해야 다.

“기초도 잘 잡혀있고, 무엇보다 태도가 바른 학생입니다. 조금 느리지만 꾸준히 하면 잘할 거예요.”


거짓말은 하지 않다. 모든 단점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부모가 모를 리도 없다. 그러니 부정적 언어보다 긍정의 언어로 희망을 주려고 한다. 낯선 환경에 아이를 맡긴 부모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엄마를 보내 놓은 요양원의 복지사에게 서운한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땀이 많은 어머니의 몸에 피부병이 생겼다고 해서 ‘피부병이 생길 정도면 제대로 씻기지 않거 아니에요?’라는 말은 할 수 없다.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할까 봐, 복지사의 상한 마음이 엄마에게 닿을까 봐 나는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친척들의 안부전화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괜찮아? 가봐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결같다. 다들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말로 전화를 끊는다.

"밥 잘 챙겨 먹고, 건강 챙겨."

.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해준다. 혼자 산다는 이유로 마치 난치병에 걸린 환자 대하듯 하는 안부인사는 반갑지 않다. 하지만 거기다 대고, ‘동정은 사절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말에도 예의와 배려라는 것이 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만나면 반갑고, 헤어질 때는 아쉽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 거다.


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말했다면 어땠을까?

“고양이가 목욕을 안 했나 봐요. 털에 윤기가 없네요.”라고 말했을 때 행복해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의 습성대로 살아야 하는 고양이에게 윤기를 강요한다는 거 자체가 오만일 뿐이다.


“제가 찾는 책이 없으니 그냥 갈게요. 언제 또 들릴지 모르겠네요. 안 올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그 독립서점 주인은 하루 종일,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자신이 결정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의심하고 후회할 것이다. 아니면 '웬 또라이?'라며 기분 나쁜 하루를 보낼 것이다.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뭐든 될 수 있어.’라는 말의 응원으로 누군가는 힘을 얻고 자신을 믿게 된다.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라고 하는 순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 말이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말은 생각보다 힘이 있다. 마음만 갖고 말하지 않는 것보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힘을 갖는다. 그리고 말보다 더 힘이  것은 행동이다.


아이들의 글을 읽을 때, 정말 잘 쓴 아이가 아니라 진심으로 쓴 아이의 글에 왕도장을 찍어준다. 맞춤법이 조금 틀렸어도 글씨가 안 예뻐도 자신의 생각으로 쓴 아이의 글에 찬사를 보낸다. 아이는 잘했다는 말과 함께 그 도장을 보며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마음으로 하는 찬사는 찬사가 아니다.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말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감탄사로 점철된 나의 찬사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정한 찬사 아니었다. 그러니 다음 주 출근길에는 그 책방에 들러야겠다. 나를 닮은 고양이에게 다시 한번 ‘너 정말 예쁘다.’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사야겠다.

난 진심으로 파란 대문 안의 책방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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