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기로 했다(6)
횡단보도 앞에 영어 선생님이 서계셨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봄볕 아래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봄볕보다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셨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방 말고도 스타 벅스에서 뭔가를 산 듯 종이봉투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난 교실에 들어가 수업 준비를 시작했고 바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때 영어 선생님이 스타 벅스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생일 선물 겸 브런치 시작 축하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텀블러를 담은 박스가 있었는데, 박스에는 축하와 응원의 글까지 쓰여 있었다.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글에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담겨있었다.
2016년에 만났지만 가까워진 것은 1년이 조금 안 되는데, 매일매일이 신기한 사람이었다. 브런치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던 나를 끌고 들어간 선배답게 글도 정말 잘 썼다. 영어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아름다운 언어와 세계관 속에서 감탄을 하기 일쑤였다.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만큼은 불가능이다.
학원 근처의 예쁜 카페를 데리고 다니며 어떤 글을 쓰냐고 묻더니, 노을을 보여주겠다며 영종도 바닷가를 데려갔다. 벚꽃이 한창 핀 날, 벚꽃은 밤에 봐야 한다며 자유공원까지 데려간 사람이다. 아름답게 살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람의 영혼을 흉내 낼 수 없으니 당연히 글도 흉내 낼 수 없다.
텀블러를 받은 게 4월 초였다. 4월이 지나자마자 잊기 전에 텀블러 안에 든 쿠폰을 쓰려고 동네 스타 벅스로 갔다. 몇 년 전 스타 벅스에서 겪은 일 때문에 발길을 끊었던 이후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이즈 이름을 잊어 라아지로 음료를 시켰더니 쿠폰이 아깝다며 직원이 벤티를 추천해주었다. 남길 생각을 하고 주는 대로 들고 2층의 소파에 앉았다.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음료를 마시며 시집을 읽고 있는데 할리스 멤버십 쿠폰이 도착했다. 5월 쿠폰을 확인하며 생일 쿠폰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 쿠폰들 중에 사용하는 것은 1개 있을까 말까였다. 미용실에서도 생일을 축하한다며 40% 세일 쿠폰이 와 있었다. 엄마를 위해 매달 구매해온 정관장에서도 생일 선물을 가져가라고 문자가 왔다. 뭔가 쿠폰들이 4월에 총공격을 하는 듯했다.
마케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받으면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마트에서 쌓여가는 포인트 점수도, 학원 아래 카페의 프리 쿠폰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이든 공짜 음료를 마시게 될 때 괜히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또 낯선 것에 매우 긴장하는 나에게 쿠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 같다. 책방에서 책을 샀을 때 받은 연필 한 자루도 좋았다. 뜻밖의 이벤트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인생은 분명 이벤트가 아니다. 매일매일 살아내는 생활이다. 어쩌다 한 번의 이벤트로 바뀌는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2022년 4월은 아주 오래오래 기억될 쿠폰 같은 한 달이었다. 브런치 때문이다. 나는 규칙적으로 글을 쓰면서 주변을 살피고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가끔 두렵다가 자주 행복해졌다. 브런치가 아니었다면 영어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다른 세계였다.
쿠폰과 이벤트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끝난 후에는 깔끔하게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아쉬워하지 말고 즐거웠던 기분만 간직해야 한다. 그러니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한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스타 벅스에서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반쯤 마시고 더 늦기 전에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텀블러보다 더 좋은 선물은 박스에 적어준 축하 인사였고, 그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이벤트 같은 쿠폰이 준 일요일 오후의 한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선물은 내 옆에 짠하고 나타난 별똥별 같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지는 가장 아름다운 빛 말이다. 하늘의 별이 내 옆으로 내려오는 그 찰나의 영원성 같은 선물.
스타 벅스를 나서다가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옆에 없었지만 영어 선생님이 그 낭랑한 목소리로 내 귀에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세요.
분명 영어 선생님의 나비 효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