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이라는 거대한 지우개

2-1. 지워지는 기억의 터: 한남3구역의 마지막 풍경

by 도시와 사유
_DSC8299.jpeg 한남3구역의 모습. (사진: 도시와 사유)


도시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지층처럼 겹겹이 쌓이다가도, 어느 순간 거대한 지우개에 의해 무참히 문질러져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울에서 그 지우개의 이름은 ‘재개발’이다. 나는 그 거대한 지우개가 한남3구역이라는 유서 깊은 동네를 지워내는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그곳은 삶의 온기가 빠져나간 거대한 폐허이자, 도시의 기억이 소멸하는 현장이었다.


첫 발을 들인 순간, 나를 맞이한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떠나간 뒤에 찾아오는 깊은 침묵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생활의 소음으로 가득했을 골목은, 이제 바람 소리와 깨진 유리 조각을 밟는 내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붉은색 스프레이로 거칠게 쓰인 ‘철거’, ‘공가’라는 글자는 마치 동네 전체에 내려진 사형선고문처럼 보였다. 굳게 닫힌 대문, 텅 빈 창문, 주인을 잃고 나뒹구는 낡은 가재도구들은 한때 이곳이 누군가의 소중한 보금자리였음을 희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발치에 채이는 낡은 신발 한 짝, 깨진 화분 조각 하나에도 한 가족의 서사가 깃들어 있는 듯하여 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남3구역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남산을 등지고 한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터에,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실핏줄 같은 골목을 만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삶을 일궈온 역사의 현장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걷다 보면, 좁은 땅을 최대한 활용하려 애쓴 옛사람들의 지혜와 이웃과 어깨를 부대끼며 살았던 공동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키를 재던 문설주의 눈금, 벽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의 대문과 창틀은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그 동네만이 가진 고유한 표정이었다. 이곳의 길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수십 년에 걸쳐 자연스럽게 다져낸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골목은 때로 막다른 길로 끝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웃집 마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_DSC8272.jpeg 한남 3구역의 모습. (사진: 도시와 사유)


나는 빈집의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빛바랜 꽃무늬 벽지 위로 선명하게 남은 낡은 액자 자국, 누군가 미처 가져가지 못한 낡은 앨범, 먼지 쌓인 밥상. 그 사소한 흔적들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이것은 단순히 낡고 오래된 것들의 소멸이 아니었다. 한 가족의 희로애락이, 한 동네의 집단 기억이, 서울의 한 시대가 통째로 지워지는 과정이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이 모든 서사는 ‘낙후’와 ‘비효율’이라는 단어로 낙인찍히고, 더 높고 번쩍이는 건물을 위한 대지(垈地)로 환원되고 있었다. ‘도시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즉 덧씌워진 양피지처럼 오래된 텍스트 위에 새로운 텍스트가 기록되는 과정이라기엔, 기존의 흔적을 너무도 폭력적으로 지워내고 있었다.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자, 저 멀리 화려한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아이러니하게 펼쳐졌다.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곳 역시 저 풍경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외관 아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깃든 이 땅의 역사는 과연 누가 기억할까.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지우개는 낡은 건물을 지우는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의 기억까지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마지막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도시의 미래가 과연 과거를 지워낸 폐허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 것인지 무겁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은 사라지는 동네를 향한 애도를 넘어, 우리가 앞으로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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