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친구인 그녀에 대한 감사와 축복을 담아
내가 그녀를 만난건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된
학교에서였다.
동학년 선생님이었는데
처음에는 서로에 대해 잘 몰라
대면대면하다가
(사실 나는 낯가림이 좀 있다.)
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듣고
그녀가 내 교실로 찾아왔다.
"자기~ 학교 그만뒀다며!!
나도 그랬었어~" 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교사를 3번이나
그만 뒀다 다시 돌아왔다
그만 뒀다 다시 돌아왔다를
반복했다고 했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그녀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지
몇 년 안 되었을 때였다.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나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왔던 사람과는
아주 다른 타입의 사람이었다.
나도 가끔
"너 참 또라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녀는 그 차원이 달랐다.
한 날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어렸을 때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괴로웠던 적이 많아서
요즘은 집에 먹을 것을 쌓아둔다고 말하자
그녀는
"있잖아, 수행을 많이 하신 분들은
공기만 먹고 사는 사람도 있대.
나는 공기만 먹고 살고 싶어.
음식을 먹는 게 과연 좋은 걸까?"
하는게 아닌가.
아니, 음식을 먹지 않고 산다고??
음식을 안 먹으면 죽잖아!!!!
그런데 정말로 적게 드시면서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긴 해.
나는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그녀의 말 이후로
정말로 집에 먹을 것이 없었던 게
불행이었을까?
지금까지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생각에
균열이 생겼다.
또 한 날은
내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죽음이 그렇게 슬퍼요,
영화나 책에서 등장인물이 죽으면
그렇게 슬프더라."하자
그녀가 말하길
"죽음이 왜 슬퍼?
죽으면 이제 이 세상 것
다 훌훌 털어버리고
좋은 곳 가는건데?
나는 장례식장 가면
그렇게도 크게 웃고 싶더라.
좋은 곳 가세요~~ 하면서."
내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 대화 후로 좀 가벼워졌다.
누군가는 너무 팔랑귀 아니야?
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녀의 의견이 어느 면에서는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쪽 끝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녀는 저쪽 끝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정-반-합
나는 그 가운데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동일하게 대했는데
아이들의 내밀한 마음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매우 잘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반항하기도,
저항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파고들기가 통해
아이들이 점차 변해가는 것이
옆에서 봐도 보였다.
(좋은 쪽으로)
나는 그녀에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어쩜 그렇게
그 사람의 정곡을 잘 찌르냐고.
그녀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어쩜 이렇게 못 됬냐고.
못 됬다고?
나는 처음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녀가 말하는 못됨은
인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럴수도)
너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못 됬고 부럽다는 거였다.
(누구보다 잘 싸우면서 온 건 그녀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듯이
우리는 그 1년을 정말로
재밌게 보냈다.
그녀는 집이 있음에도
세컨드 집이 필요하다며
한적한 시골집을 하나 구했고
우리는 그곳을 밥먹듯 드나들었다.
해방같은 한 해 였다.
그녀와 나와의 관계가 변한 건
겨울에 함께 떠난
스키 여행에서였다.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너는 너무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어.
노력하지마.
그냥 내버려둬." 하는 말에
내 안의 어떤 버튼이 눌렸다.
나는 이 버튼을
내 자격지심,
내 열등감,
내 콤플렉스 라고
지금은 생각하는데
그때는 그말이
너무나도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해
우리 둘은 새벽까지
열띤 토론을 하다
잠에 들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언짢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아마도 우리의 관계가
조금 멀어질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 1년은
같은 학교에 있어도
다른 학년이 되어
서로 잘 볼 수 없게 되기도 하고
일부러 보러 가지 않았다.
내 버튼이 왜 눌러졌을까.
나는 이 생각이 정리가 되어야
그녀와 마음편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엄청 방황하기도 했지만
무엇을 하면
굉장히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는데
열심히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내 정체성은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인 것인가?
그녀는 내 열정이
잘 못 되었다고 짚었다.
아님 방향이 잘 못 된 것일까?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계속 생각해보았다.
열정적으로 살지 말아야 하나?
아님 만약 잘 못 된 길로
가고 있다면
방향을 틀어야 하나?
내 마음 속 두 목소리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A : 열정적인게 나빠?
B : 모르겠어. 잘 못 된 방향으로 열정적으로 나아가면
문제이지 않을까?
A : 하나씩 생각해보자. 무언가 열심히 하는 걸 멈출래?
B : 아니, 나는 신나게 일하고 싶어, 재밌잖아!
A :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지. 그럼 해!
B : 그런데 방향이 문제인 것 같아.
A : 그래서 그녀가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갈래?
B : 아니.
A : 그럼 뭐가 문젠데?
B : 내가 지금 잘 못 된 길로 가고 있으면 어떡해?
A : 잘 못 된 길로 가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B : 실패하겠지.
A : 실패가 나쁜거야? 아님 두려운거야?
B : 두렵긴 한데 나쁜 건 아니야.
A : 두려워?
B : 응. 체면도 구기잖아.
A : 체면 구기는 게 싫어? 너 그렇게 남의 시선 신경쓰면서 살아?
B : 아니, 그렇진 않아. 누구나 실패보다는 성공을 원하잖아! 나도 성공하고 싶어.
A : 성공하고 싶으면 실패도 당연히 거쳐야 하는 거 아니야?
B : 그렇지. 무언갈 하다보면 실패도 하게 되고 그러다 성공도 하게 되고.
A : 답 나왔네. 끝까지 해봤는데 실패면 그때 수정하면 되잖아. 아, 이 길은 아니군 하고.
B : 그러네. 그 실패로 나는 확실한 건 하나 알게 된 거니까.
이렇게 하면 망한다.
A : 오케이, 해결 끝.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끝까지 해봐. 그럼 알 수 있겠지.
이 답이 나오기까지
1년이 걸렸다.
내 정체성은 타인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자
내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졌다.
잘 못 한 거라면
그때 핸들 돌리지 뭐.
땅을 견고하게 딛고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30대의 사춘기는
불안정한 발밑이 단단해져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 후 우리는 다시 관계를 회복했고
가끔씩 전화를 주고 받거나, 만나거나 한다.
(지금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서 자주는 못 본다.)
내가 고민이 생겼을 때
그녀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
연락하기도 하고
좀 엉뚱한 의견을 듣고 싶을 때
그녀를 찾게 된다.
내게 너무 소중한 친구인
그녀.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그녀가
건강하고 오---래 행복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