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집념의 화신

엄마는 본인의 삶으로 보여주셨다.

by 사춘기 엄마

학교생활기록부에

'끈기가 있고 성실함.'이라고

적는다면

단연코

우리 엄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그 문장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마는 4남 1녀 중 가운데 딸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

초등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를 가지 못하고

(외할아버지는 딸교육에 무관심하셨다.)

오빠들, 남동생들

밥 해주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식모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20살이 된 엄마는

기이한 인연(?)으로 아빠를 만나

일찍 결혼하여


언니, 오빠, 나를 낳게 되었다.


아빠는 대학을 나와

아주 일찍 농촌진흥청 그리고 농협에서 근무하면서

젊은 나이에 빠르게 승진하게 되어

아빠 말로는

끗빨 날리며 다녔다고 했다.


엄마는

항상 마음 깊은 곳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공부를 했다면 내 삶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 남았었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엄마가 속편하게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빨 날리며

회사를 다니던

아빠는

어느날 갑자기

엄마와의 상의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셨고

그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장사 속으로 뛰어드셨다.


내가 중학교를 올라갈 때

꼬치전문점 체인점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 중 한 체인점을 열게 되었다.


엄마가 가진 많은 장점 중에

손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식당 운영에 있어서는

최고의 메리트였다.


프랜차이즈였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초창기라

그 규율이 엄격하지 않아서

엄마는 모든 음식 재료를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사오지 않고

양념부터 꼬치까지 모두 다

엄마 손으로 정성껏 만드셨다.


호프집이라 오후 늦게부터 아침까지

일하셨음에도

재료 손질부터 최종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 엄마 손으로 하셨기 때문에

해야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엄마는 잠을 줄이셨다.


하루에 3-4시간만 주무시면서

10년을 그렇게 사셨다.


엄마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어떻게 맛없을 수가 있었겠는가.


원래도 요리를 잘 하셨지만

엄마의 요리는 그 양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과 법원 앞에 있었던

엄마의 호프집은

대학가 학생들을 배불리고

법원 직원들의 회식처가 되었다.


우리집은 빠르게 경제력을 회복했다.


엄마는 3-4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도

어느 날부터 댄스를 배우러 가시겠다고 했다.


매일 일만 하니

몸이 망가질 것 같아

스포츠댄스를 배우면

운동도 되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같으면 한 시간이라도 더 잘텐데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동사무소에서 실시하는

스포츠댄스 강좌를 무려 5년을 다니시면서

룸바, 차차차, 자이브 등 모든 종목을

다 마스터하게 되셨다.


그러자 춤선생님께서 이제 더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스포츠댄스 강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지만

엄마는 강사에 대한 꿈이 없다고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당시

스포츠댄스만 배운 게 아니었다.

스포츠댄스를 배우고 있는 도중

집 근처 예술회관에

사람들이 기타를 메고

들락날락한다면서

엄마께서는 기타를 한번 배워보시겠다고 했다.


엄마는 기타의 매력에 완전히 빠지셔서

통기타, 일렉기타를 사셔서

7년을 연습하셨다.


예술회관에서 배우는 것은

너무 초보 레벨이라면서

따로 음악 학원을 다니시면서

공부를 하실 정도였다.


장사를 하는 10년동안

엄마는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해내셨다.


하지만 10년의 호프집 장사는

결국 엄마의 몸에

갑상선암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엄마, 아빠는 장사라 함은

365일 무휴가 원칙이라면서

10년동안 한번도 가게문을 닫지 않으셨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와

취미생활을 병행하셨으니

엄마의 몸에 당연히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엄마의 암을 계기로

장사를 다 접으시고

5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하셨다.


엄마는 암 치료를 받으시고

이제 자유의 몸이라면서

취미 생활에 더 깊이 매진하셨다.


기타를 배우면서 다녔던 음악 학원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접하게 된 엄마는

기타는 재밌지만

크기가 크고, 가지고 다니기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오카리나가 공연하기에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카리나까지 섭렵하시기 시작했다.


오카리나를 너무 잘 부르게 되어

버스킹 공연도 하시고

시에서 지원해주는

봉사팀에 들어가

오카리나 공연을 다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 엄마는

대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실용음악과에 가서

제대로 음악에 대해 배워보고 싶다는 꿈이 생기자

엄마의 학력이 걸림돌이 되었다.


엄마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차례대로

보았다.


그러면서 영어를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영어 과외를 무려 2년동안 받으셨다.


엄마는 바램대로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말에 가서 수업을 듣는 대학교였는데

엄마는 너무나도 신이 나셔서

과대도 맡으시고

그 주변에 제대로 된 식당이 없다며

과 사람들과 먹을 점심거리를

매주 준비해서 가셨다.


엄마의 주력 악기는 오카리나였는데

엄마가 워낙 열심히 연습하니

교수님이

이탈리아 현지에 가서

수업을 한달 정도 듣고 오면 어떻겠냐고,

추천해주겠다고 해서

엄마는

이탈리아에 가서 한달을 공부하고 오실 정도로

엄마의 학업 열정은 대단하셨다.


우리 집에서 언니 다음으로

해외 유학을 한 사람이

엄마가 되었다.


엄마의 대학 졸업식이 2020년 2월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엄마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눈치채셨으리라.


2020년은

바로 코로나가 터진 그 해이다.


고대했던 졸업식은

코로나로 인해

취소가 되버려서

우리 모두

특히 엄마가 아쉬워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일에 대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공부 콤플렉스는

엄마의 의지로 인해

극복되고 있었다.


오카리나 공연을 계속 다니시다가

사람들이 캘리그라피를 많이 배운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엄마는

당장에 캘리그라피 교육을 받으러 가셨다.


악기는 그 소리 때문에

늦은 밤에는

연주할 수 없으니

밤에 조용히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것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엄마는 항상 우리집에

그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막내는 왜 그림을 잘 그릴까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재능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었다.


엄마도 몰랐던 것이다.

본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엄마는 또 잠도 자지 않고

5년이 넘게

캘리그라피에 매진하고 계신다.


엄마가 만약

초, 중, 고 때

학교를 다녔다면

단연코

의대를 갔을 거라고

우리 식구들 모두 말한다.


엄마 또한

자기가 생각해도 그랬을 것 같다고

아쉽다고 하신다.


그 끈기,

인내심,

성실함,

끝까지 해내는 집념


언니, 오빠, 나는 그 끈기와 집념을

물려 받은 건지 아닌 건지

좀 헷갈리지만


우리 엄마는

항상 나에게 자극을 주는 사람이다.


한결같이 무언가를 배우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엄마가

무언가를 하면 끈기있게 해봐 라고 하면

그 말에 굉장한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의 삶으로 보여주셨으니까.


지금도 엄마는 오카리나 봉사 공연을 다니시고

매일 캘리그라피를 쓰신다.


어깨도 안 아프냐며

나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데

엄마는 여태껏 어깨나 목 아픈 적도 없다면서

잠도 안 주무시고 새벽까지 그림 그리시다가

동 트면 텃발일 하시는 생활을 하고 계신다.


우리 집 곳곳에 놓여있는

엄마의 작품을 보면서

엄마가 항상 행복하기를

건강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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