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도 저마다의 등껍질이 있다

by 서진




나는 담백하지만 촉촉한 사람이고 싶었다.

내가 쓰는 글은 담백하고 건조하지만 그게 다는 아녔으면 좋겠다고 바라 왔다.


나는 담백한 것이 좋지만 기교도 좋아한다.

취향을 말하는 것은 그래서 항상 어려웠다.


가령 보컬을 예로 들자면, 보컬 수업이라곤 전혀 받은 것 같지 않은 자신의 목소리 그대로 노래를 하는 것 같은 가사도 정제된 느낌이 없는, 감정을 토해낸 것 같은 인디 가수나 락커의 거친 음색도 좋아하고 절정의 기교를 보여주는 감미로움의 극치인 알엔비 보컬도 좋아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색깔을 지녔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들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느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나 잘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느냐

그래서 한창 유행하던 vs 식의 취향 대결을 무척 싫어했었다.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취향은 항상 한쪽으로 몰렸고 그 대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타고난 부분으로 이미 가진 자가 승리하는 그 무의미한 놀이가 싫었다. 그리고 그런 놀이에서 항상 승리하는 쪽은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아니 덜 갈리는 쪽이었다. 선호하는 사람만큼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싫어하는 이의 목소리가 항상 크기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싫어하는 이들은 싫어함을 강하게 주장하려 들고 그 싫어함은 대상의 개성이 강할수록 더 극렬하게 그런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나는 여자이지만 낮은 목소리 톤을 가지고 있는데 어릴 때 국어 시간에는 국어 선생님이 내 목소리 톤을 좋아하셔서 국어 교과서를 읽어야 할 때마다 나를 시켰다. 그 국어 선생님도 목소리가 나처럼 낮았다. 그때의 나는 비록 혀가 좀 짧기는 하지만 나의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부분이라고 말하며 목소리도 낮고...라고 얘기했을 때 순식간에 나의 자랑스러웠던 목소리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 되었다. 나의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많은 지분을 목소리 탓을 했다. 내 목소리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본인 성격이 무뚝뚝한 걸 왜 목소리 탓을 하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입을 열었을 때 밝은 인상을 주는 소프라노 톤을 가진 친구들이 그때는 부러웠다



지금의 나는 내 목소리를 싫어하다가 좋아하다가 한다. 어쨌든 목소리는 목소리일 뿐이다.



어떤 부분적인 특성은 개인을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물도 마찬가지고 작품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것들을 갈고닦아 순위를 매길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복잡한 총체의 합이 결과인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 결과라는 것도 결국 지금 이 순간의 판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들을 믿고 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크릿류의 기적이 아니다. 이미 기적의 씨앗이 각자의 안에 자리하고 있고 그걸 어떤 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많은 조건들이 그저 조건일 뿐이다.



개의 후각이 좋고

매의 시력이 좋고

범의 다리가 탄탄한 것처럼


우리는 타고난 많은 것들을 조건으로 달고 태어났다.


타고난 것들 중에 기질과 성격 재능 그 무엇도 소위 말하는 세상에 먹힐 만한 것이 없어 보일 때 평소에 믿지도 않은 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잘하고 싶은 것들은 노력하면 얼추 그것을 즐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은 얼마간의 재능이 있었다면 좀 더 자신감 있게 세상을 살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렇게 가진 재능이 없나요라고 신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그 불완전한 부분들을 타인이 지적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 들키고 싶지 않다. 남들이 몰랐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


이 말대로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도 나인데 그런 나는 어떡해야 하나요.

내면의 꼬마 천사는 항상 나에게 속삭인다. 내 탓을 하는 것이 가장 쉽지 않냐고 남을 탓하는 게 괴롭다면 너를 탓하면 되지 않냐고

나는 그것이 내 안의 천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다. 자기 자신에게 모든 문제를 특히 타고난 부분의 문제를 모두 돌리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고 세상도 갉아먹는다. 천사의 탈을 쓴 꼬마 악마가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원인으로 손쉽게 나를 탓하라고 부추길 때마다 나는 감화되었었다.


아주 작은 일들에 의기소침해지는 아이

나를 부정하면서 느끼는 죄책감이 타인을 향한 미움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아이

그 내면의 목소리와 손절하고 나니 드는 생각은 어떤 조건과 감정들이 나를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선택으로 나는 작아지기로 스스로 결심해왔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물성과 내 성격적 부분들을 무작정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련다. 그 모든 부분 부분이 나지만 그 부분들의 총체가 내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손의 안 쪽 지문으로 손등과 손가락을 연결하는 부분의 딱딱한 관절을 어루만져 본다.


이것은 나인가 나의 일부분에 불과한가.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나의 못난 부분과 잘난 부분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담담하게 주어진 삶을 살기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짐이었다가 선물이었다가 하는 그 무엇! 나는 내 몫의 등껍질을 짊어진 거북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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