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저녁 일상은 이랬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우선 tv부터 켠다. tv의 화면이 채 켜지기도 전에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두 기계가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본다. 할 일 없이 카톡 창을 들여다보고 인스타그램에도 들어갔다가 유튜브에도 들어갔다가 포털도 봤다가 이 왔다 갔다를 별 의미 없이 몇 번 반복한다. 그러다 노트북 화면이 켜지면 유튜브에 들어가서 구독해 놓은 유튜버들 새로 뜬 영상이 있나 확인한다. 이미 지하철에서 훑어봤기 때문에 대충 알고 있지만 그 잠깐 사이에도 새로 뜬 영상이 있는지 확인하고 보기 시작한다. 티브이는 적당히 볼만한 유퀴즈나 나 혼자 산다 같은 예능 재방송을 틀어놓고 볼륨은 거의 소리를 알아들을 정도로만 조절해 놓는다. 티브이를 틀어놓는 이유는 큰 화면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형상이 나오고 있으면 집안이 덜 적적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낯선 타인들의 생활 소음에 안심이 되는 것처럼 철저히 배경으로 기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볼 일은 없다. 유튜브 영상은 집중해서 보느냐 그렇지도 않다. 대부분 구독한 유투버들이 잔잔한 일상 유투버들인데 틀어놓고 1분을 견디지 못하고 구간 건너뛰기를 한다. 그냥 내가 구독한 유튜브 새 영상을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지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 그런 일상 브이로그들을 보게 된 건 나 아닌 사람들이 일상을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채우는가 궁금해서였다. (보다 보니 대부분 비슷했다. 맛있는 거 먹고 일하고 친구 만나고 애인 만나고 사고 싶은 물건 사고 가끔 여행 가고 그런데 왜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은 이렇게 비슷한데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이제는 그 사람의 일상의 패턴이 뻔해져서 화면에 마우스로 커서를 움직이면서 보고 싶은 부분만 대충 본다. 그러면서 폰으로 배달 앱을 켜고 야식을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열심히 가게들을 서치 한다. 그렇게 이 영상 저 영상 보면서 치킨을 한 마리 해치우면 나의 저녁 쉬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마치 관람차를 타고 언제까지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그 사이를 채우는 나의 하루의 내용물은 통조림 캔에 든 설탕물에 절여진 복숭아처럼 뻔하다. 통조림 캔 겉면에 복숭아가 들어있음 여지없이 복숭아, 겉면에 참치가 들어있음 참치고 꽉 채워진 삶. 그것에 사실 별 생각도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크게 자극이 오지 않은 영상을 보는 일은 시간도 잘 가고 내가 가진 여러 가지의 문제들과 현실과는 상관없이 내 삶을 하루하루를 적어도 별 일 없이 균일하게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 나는 언제부터 내가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졌는지 그 시기의 “마음”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영역이라 사실 이렇게 동시에 뭘 보고 하는 것은 뭐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기사를 본 이후부터? (이것은 확인 사살에 지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영상들을 기억하려고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삶이 너무나 느슨하기 그지없는데 이대로 살다 간 끝은 뻔하게 예상되어진다는 본능적인 위험 신호와 그렇게는 계속 살기 싫다는 야망 때문에?
잘 모르겠다. 마음이 따르는 대로 살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니 순간의 작은 쾌락만을 보상으로 주면서 그 유명한 격언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의 그 철저한 예시가 바로 “나“인 거 같아서였을지도.
“나 다운 나”로 살고 싶어서 “나 아닌 나”가 될 필요성이 있었다. 하고 싶지만 두려워서 하지 못하던 일들을 저질러 놓고 보면 뭐라도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작년부터 많은 것들을 저질렀다. 평생을 이름은 없으나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관람차 안에 앉아서 밖에서 팡팡 터지는 폭죽 같은 화려한 인간들을 관찰하며 멍하게 살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나는 내가 탄 관람차에서 내려서고 싶었다. 내리고 나니 의미 없이 하던 일들은 자연히 그만두려고 마음먹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안 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도 같고 결국 발버둥 치다가 제 자리인 것도 같은 지금의 위치에 서서 가야 할 방향을 생각한다. 우선 관람차에서 내리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고 아직도 아연하다. 내 글은 그런 어지러운 마음처럼 갈피를 잃는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나 자신에게 잘 가고 있는 거지? 물어봤자 답을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안다와 믿는다는 다른 의미이다. 알기 위해 질문하면 질문할수록 의구심만 들었다. 정말 맞아?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 추궁하듯 묻는 질문은 항상 응.. 그럴걸 으,.. 아니라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니 나는 질문의 횟수를 줄이고 그냥 무작정 선택한 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한다. 그래도 허공을 뱅글뱅글 도는 삶이 아니라 내 두 발을 바닥에 딱 붙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만으로 어디랴.라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나의 22년은 그렇게 내가 탄 관람차에서 내리기로 작정한 해였다. 많이 비틀거렸고 막막했고 그럼에도 자신 있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해가 저물어 간다. 여섯 달간의 백수 생활이 꿀같이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 시간 영어 공부를 하고 12시가 되면 그날의 메뉴를 엄선해서 정성껏 점심을 차리고 점심을 먹은 뒤 책을 읽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저녁에 먹을 메뉴를 생각하며 운동 갈 채비를 한다. 혼자서 운동을 하기도 하고 운동 선생님께 피티를 받기도 하면서 운동을 끝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하고 sns에 들어가서 사람들 게시물에 댓글을 달고 나의 일상도 올린다. 밤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보고 없는 날이면 조금 여유를 부리면 저녁 시간의 달콤한 휴식을 누린다.
이런 패턴을 계속해서 몇 달간 해왔다. 하루 일과를 조금씩 수정하기도 했지만 큰 틀은 거의 비슷한 루틴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삶을 한번 살아보니 이전으로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내 생활의 우선순위를 확 바꿨고 돈 버는 일 외에는 무의미하게 채워졌던 삶의 시간표를 하고자 하는 일들로 꽉 채웠다. 그렇게 내가 세운 계획의 하나를 오전에 완수하고 점심을 준비하며 부엌 창가에 서서 찌는 듯한 여름의 밖을 바라볼 때,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리뉴얼 공사가 진행 중인 단골 헬스장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운동을 마치고 땀 흘리며 집으로 돌아올 때(나는 공사 중임에도 시설 이용권을 허용받은 몇 안 되는 회원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마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러 잠깐의 외출을 할 때, 하루 일정표에 모두 동그라미를 그리고 더 이상의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을 때의 평온함을 느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음의 무 위한 하루에 충만함을 느낄 때의 행복! 그 감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충만함 외에는 이룬 것 없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올해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내가 원하는 행복은 언제나 아련한 저 멀리 판타지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건만 지난여름은 다시는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렴풋이 감을 잡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나를 씩씩하게 살게 했다.
겨울이 왔지만 올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에어컨이 빵빵 틀어져 나오는 백화점에서 일할 때는 여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계절이 의미가 없었다. 여름에는 지금 내가 파는 물건이 비수기인가 성수기인가 그런 생각들은 했었다. 시계를 팔 때는 사람들이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노출을 많이 하는 계절은 액세서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허전한 팔을 채우려고 시계를 보러 좀 더 왔으므로 성수기였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선물로도 파티용으로도 많이 마시게 되는 와인은 겨울이 성수기다. 몇 년 간의 나의 계절에 대한 기억은 그랬고 항상 건물 안에서 계절과 상관없이 일했다. 지금이 그래도 나은 건 바깥이 보이는 1층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 일을 하면서 눈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마음껏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비슷해도 그 하루의 결을 살짝 비틀 수 있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고.
비록 비튼 흔적은 금세 사라지고 말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