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 쉬세요
여유 있게 집에서 보내고 있던 일요일 오후 4시, 회사 시스템으로 메일이 하나 왔다. 회사 메일과 메신저가 핸드폰에 연동된 건 업무의 편의성을 높여준 것은 맞지만 심리적으로 하루 종일 출근해 있는 느낌을 주곤 한다. 그래서 주말에는 메일이나 메신저가 오더라도 전화가 오지 않는 한 읽지 않는다. 그게 내 휴식을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베짱이랄까?
혹시나 급한 메일일지도 몰라서 열어보지는 않고 슬쩍 제목과 발신인을 보았다.
'(공유) xxxx사 실적 동향'
음, 분명 업무에 도움이 되는 메일이긴 하지만, 굳이 꼭 휴일에 열어볼 필요는 없기에 안 열어 보기로 하고, 발신인을 보았더니, 팀장님이다.
우리 팀장님은 항상 주말에 출근하시기에 메일 알람이 왔을 때에도 왠지 팀장님이 보내셨을 거란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다. 팀장님은 왜 주말에 집에서 쉬지 않고 출근하시는 것일까?
차마 팀장님에게 "주말에 왜 출근하세요?"라고 물어볼 순 없지만, 예전에 임원 한분이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나처럼 회사 30년 정도 다니다 보면 회사가 집보다 편해. 생각해 봐, 집에 있어봤자 마누라 눈치 봐야 하지, 밥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하지, 어디 치울 데 없나, 집안일 할거 없나 봐야 하잖아. 예전처럼 가만히 앉아서 밥 내놔라 청소해라 하면 요즘은 황혼이혼 당한다니까. 그런데 회사에 있어봐. 다들 나에게 깍듯하게 대하지, 식사때 되면 식당에서 밥 나오지, 에어컨도 시원하고, 청소는 청소 담당하는 용역이 하지, 윗사람들이 휴가 안 쓰려는 이유가 그러라니까?"
물론 약간 농담을 섞어서 한 말이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럴듯한 이유였다. 잠자는 시간 말고 평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그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회사에 있는 게 편하고, 회사에 있는 게 익숙할 수도 있다. 당연히 회사에서 논다는 것은 아니고 요즘은 그랬다간 대번에 어딘가 공개돼서 부관참시를 당할 가능성이 높지만, 심리적으로 안정된다는 말은 공감이 된다.
또 다른 임원분은 우스갯소리로 근무시간은 충성심이라고 하셨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출근하는 건 부하직원들에게, 그리고 사장님에게 내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자기가 임원이 된 이유 중 하나라 그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셨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나름 insight가 있고 알고 계신 것도 많은데, 그 충성심 때문에 항상 회사에 계셨다. 굳이 그렇게 근무시간으로 보여주지 않으셔도 성과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으시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찮은 아랫사람 입장에서 그런 말은 어불성설이기에 참았다.
현장에서 야간 근무를 할 때 새벽 1시면 업무용 폰으로 문자가 왔었다. "How's it going?" 현장 담당자에겐 마치 긴급 상황을 알리는 듯한 문자였다. 현재 상황을 이슈와 함께 정리해 30분 내에 보내야 한다. 혹시나 문자 확인이 늦어지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다음날 전화가 와서 야간 담당자가 누구였냐는 질문이 내 위에 관리자에게 갈 수도 있으니. SMS 제한인 70자를 맞추기 위해 몇 번을 쓰고 지우고 한 후 문자를 보내면 즉시 혹은 늦어도 다음날 새벽 5시 전에 Okay라는 답이 온다. 문제가 있다면 추가 질문이 오는 경우도 있고.
해당 문자의 발신자는 고위 임원분이셨다. 늦은 밤까지 모든 부문에 대해서 상황을 체크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다시 회사에 대한 업무의 시작이셨다. 하루 3~4시간 주무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전히 회사와 연계된 삶이셨다. 저런 삶이 재미있을까 싶긴 했는데, 그분 얼굴을 보면 그냥 이런 걸 즐기시는 것 같았다. 난 이렇게는 어렵겠다.
안타깝게도 나도 사람이 많지 않지만 작은 조직의 관리자가 된 후 휴일에 출근을 했었다. 내 목적은 주중에 발생한 이슈와 메일을 상세히 읽고 전체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었다. 별도로 파일을 만들어 현황을 정리하고, 모든 이슈들의 원인과 해결책 등을 확인해서 영향을 평가했다. 주말에 나오는 게 싫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업무에서 뒤처질 것 같았다. 왜냐면 일은 부하직원들이 하기에 이슈의 숫자는 부하직원의 숫자만큼 곱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 년 넘게 큰 이슈가 없으면 주말을 삭제하고 회사에 몰입하다 보니 내가 회사의 부속품인지, 내가 회사의 직원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거의 사와일치(물아일치에서 물을 회사의 사로 변경) 회사와 내가 하나로 된 느낌이었다. 아이와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물론이었다.
그래서 혼자 고민해 보았다.
내가 주말에 하는 일이 꼭 주말에 나와서 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고민 중에 얻은 결론은 꼭 주말에 해야 할 일은 아니란 것이었다. 그래서 주말은 큰일이 없으면 무조건 쉬기로 하고 일이 있으면 차라리 출근시간을 당겨보기로 했다.
처음엔 조금 불안하긴 했는데, 월요일에 조금 일찍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 내에 하려고 하니 또 되었다. 주말에 출근하면 아무도 없다는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일을 더 늘려서 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말을 온전히 가족과 보내면서 아이와 와이프와의 관계가 훨씬 더 좋아졌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난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아이는 친구와 놀고, 와이프는 지인들을 만났는데, 주말을 온전히 쉬면서 가족이 함께 전시를 보던, 산책을 가던, 굳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도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휴일에 출근하는 것을 그만두는데 가장 큰 고민거리는 내가 출근하지 않으면 출근하는 다른 사람에게 밀리는 건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갈아 넣으며 내는 성과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성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게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통하는 해법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