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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 직장인에게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

이과라서 죄송합니다.

by 구르미

이과생으로, 공대생으로, 공정 전문가로서 숫자로 살아온 내게 글쓰기는 낯선 일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선택하고 공대를 졸업한 뒤, 나는 숫자와 가설‑실험‑결론의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실험 결과가 p<0.05이면 ‘맞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단순했는 모른다. 그러나 관리자의 자리에 올라선 직후 나는 난생 처음 단어 앞에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보고서 한 장이 프로젝트 예산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정도면 그냥 ‘이송합니다’라고 해야겠는데요”


얼마 전, 우리는 생산 관리 시스템(PMS)을 도입하려 했다.

나는 URS(User Requirement Spec)처럼 장점을 나열했다.

실시간 데이터 수집 → 능률 향상

이력 추적 → 문제 예방

모듈형 구조 → 확장성 확보


『이게 있으면 다 좋아집니다』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회의실 끝에 앉아 있던 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꼭 지금 설치해야 하지? 나는 잘 모르겠네. 다시 정리해 와요.”


당황한 나는 문과 출신으로 오랫동안 임원과 호흡을 맞춰 온 다운 팀장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팀장님은 내 제안서를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그냥 ‘이송합니다’(이과라서 죄송합니다. 원조: 문송합니다.)라고 해야겠는데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팀장님은 차분히 이어갔다.


“이건 정보의 *일방통행*이에요. 보고 받는 사람의 궁금증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해요. ‘능률이 향상된다’면 얼마나 향상되는지, ‘위험을 예방한다’면 어떤 위험을 얼마나 줄이는지 써야죠. 또 왜 이 모델을 골랐는지, 다른 대안은 검토했는지도 보여줘야 해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글은 데이터를 잔뜩 얹어 놓았을 뿐, 독자의 물음표를 지우지 못했다는 것을.


회사 생활을 위한 글쓰기는 어떻게 달라야 할까?


그럼 회사 생활을 위한 글쓰기,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보고서를 위한 글쓰기는 어떻게 달라야 할까?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보고서를 쓴다는 것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이과생이라면 이과생의 장점을 잘 살려 독자, 즉, 내 윗분이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옮겨 적어야 한다.


아무리 보기 좋은 결과물도 내용물이 있어야 한다. 그 내용물을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기억해 보자.


1. 추상 대신 구체, 주장 대신 근거


가장 흔히 하는 실수는 추상적인 내용을 쓰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효율이 좋아지고 능률이 높아집니다."

근거가 없는 이런 말은 단순히 '호소'이고, 이런 말을 보고서에 쓴다는 것은 글자를 낭비하는 것이다.

왜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왜 효율이 좋아지고, 효율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좋아지는지를 보고서에 써줘야 한다. 예를 들면,

"사전 시뮬레이션 결과 평균 작업시간이 18% 단축되어 총 3명의 인력 절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근거로 어떤 결과가 나왔고 실질적으로 어떤 현실적인 효과가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숫자와 실험 설계, 신뢰 구간 등 검증 가능한 근거를 곁들이면 주장에 생명력이 생긴다. 핵심 메시지를 먼저 내놓고, 표·그래프·사진으로 뒷받침하자.


2. 리스크와 시급성을 명확히


사람은 위험 앞에서 더 빨리 움직인다. “언젠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 대신,

- 발생 가능 사고: 데이터 누락으로 인한 불량 제품 출하 → 빈도 월 2회 → 손실 건당 약 1 천 만 원

- 시한: 올해 3분기 전까지 개선 필요

과 같이 리스크·빈도·손실·시한을 구체화해보자. 그럼 보고 받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단, 양치기 소년 처럼 실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억지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다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인물 임원에게 호되게 혼나고 신뢰도가 나락으로 갈 수 있으니 주의하자.


3. 대안 비교 후 ‘왜 지금, 왜 이것’인지 제시


연애할 때 상대방에게, "짜장면 먹자"라고 말하면 강압적이고 독단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지만, "짜장면 먹을래, 국밥 먹을래?"라고 하면 국밥을 싫어하는 사람 입장에선 "어, 나 짜장면 먹을래!"라고 하면서 자기가 선택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사실은 일부러 뽑지 않을 옵션을 추가했는데도 말이다.


보고할 때에도 최소 세 가지 후보를 놓고 기능·비용·확장성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한다. 흔히 말하는 프레젠테이션 ‘3의 법칙’ 은 기억·설득·결정을 돕는다. 후보군에 대한 기능·비용·확장성을 비교한 테이블을 추가하여 각각에 대해 apple to apple로 비교하고 각 항목의 아래에 Best / Likely Best / Worst 를 살짝 표시해 두면, '내가 검토했을 때에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너의 의견은 어떠니.' 라고 보고서를 통해 대화를 거는 것이 된다. 이 경우 보고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아, 얘가 여러가지를 고민했구나.' 하며 결정에 조금 더 용이해질 수 있다.


<참고> 프리젠테이션 '3의 법칙'

프레젠테이션에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한 "3의 법칙"은 크게 세 가지 핵심 요소를 포함한다.

첫째, 발표 내용을 서론-본론-결론의 3단계 구조로 구성하여 청중의 이해를 돕고,

둘째,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여 기억하기 쉽게 만들며,

셋째, 3가지 핵심 근거 또는 사례를 들어 주장을 뒷받침하여 설득력을 높이는 것이다.


4. 내용이 먼저, 디자인/유사어구는 나중


"보고서는 Beautify 작업"이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보기 좋은 형식은 단단한 내용이 있을 때 빛난다. 좋은 요리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재료가 나쁘면 훌륭한 맛을 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스토리를 짜고 그 스토리에 맞는 표를 먼저 채운다. 그리고 나서 그 표에 맞는 헤드라인을 짠다.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헤드라인 부터 적다보면 껍데기만 있는 의미 없는 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5. ‘나는 이과라 글을 못 써’ 대신 ‘독자는 무엇이 궁금할까’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도 글쓰기와 동일하다. 내 글을 처음 읽는 구독자가 딱 한 번만 읽고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간 좋은 글이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에는 자리에 앉아서 고민하는 것 보다 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추천한다. 보고서의 스토리가 안 그려질 때에는 무작정 걸으며 보고서를 머리속에서 계속 쓰다보면 어느 순간 좋은 그림이 나온다.


글쓰기는 숫자를 사람에게 건네는 다리다


글쓰기는 분석 결과를 행동으로 바꾸는 설계도다. 실험실에서 통하던 0과 1이 조직을 움직이는 문장이 될 때, 변화가 시작된다. 과학적 정확성과 독자 중심 서술이 만나는 지점—그곳에서 숫자는 회사의 언어가 되고, 우리는 더 넓은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한다.


다음 보고서를 쓰기 전, 한 번 더 자문해 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썼나? 상대가 듣고 싶은 답을 썼나?”

그러면 숫자도, 글도, 우리도 한층 더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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