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동네 친구 지훈이와는 오래됐기도 했지만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다. 원래 같은 동네에 살 때엔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놀았고, 대학생 때에도 명절 때면 만나서 같이 술 마시며 사는 이야기 하고 게임이야기 하다가 여자 이야기 하다 보면 밤새 수다 떠는 경우도 많았다.
첫 회사를 지방으로 가면서 한동안 못 만나다가 다시 고향 근처로 옮기면서 자주 볼 수 있게 됐는데, 확실히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여유가 없어 실제로 보는 건 일 년에 한 번 정도였다. 연락은 없어도 잘 살겠지 하는 그런 정도.
그런 지훈이가 갑자기 연락이 왔다.
"르미야, 너네 회사에 자리 좀 있니?"
"지훈아, 웬일이야? 근데 그건 무슨 말이야? 너 회사에서 무슨 일 있어?"
"그냥 회사가 어려워져서. 아무래도 내 나이에 이직은 무리겠지?"
"그렇지, 스타트업에 팀장 정도로 스카우트되는 거 아니면 올라가기보단 내려가는 경우가 훨씬 많지. 그냥 더 버텨. 그리고 우린 아직 한창 일할 때잖아!"
"그렇지, 나도 열심히 일할 수 있는데, 어린애들이 보내는 눈빛 보면 막상 그렇게 기운이 안 나네."
"괜한 소리 말고, 내일 뭐 하냐? 형이 한잔 살게!"
"그래, 오랜만에 동생한테 술 좀 얻어먹어 보자!"
지훈이는 한때 잘 나가던 대기업의 과장이었다. 인사팀에 있었고, 그의 손을 거쳐 수백 명의 채용과 승진이 결정됐다. 하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회사는 잇따라 무리한 투자를 단행했고, 몇 번의 실패 끝에 실적이 추락했다. 결국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고, 지훈이는 ‘구조조정 계획서를 작성하는 담당자’이자, 동시에 ‘대상자 후보’가 되었다. 이런 씁쓸한 신세한탄을 같이 듣고 있자니 그날따라 소주가 더 쓰게 느껴졌다.
"대기업 다니면 40대까지만 버티면 다행이지. 젊을 때 갈아 넣고, 나이 들면 정리해고 대상 되는 거야. 사오정(사십대 말, 오십대 초가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말 알지?"
예전에 어떤 선배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나한테는 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혹은 아무도 모르게 가까이 온 이야기 인 것 같다.
대기업은 중소기업보다 급여도 복지도 좋지만, 대신 정년까지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인식. 그래서 더 치열하게, 더 빨리,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대기업이라고 해서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예전에 다니던 회사는 전형적인 ‘역삼각형’ 구조의 회사였다. 말 그대로, 연차 높은 인원이 대부분이었고, 말단 사원이 거의 없었다. 내가 그 회사를 나올 즈음에는 아예 사원이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오래된 회사였고, 자체 제품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던 곳이었기에, 크게 벌지도 잃지도 않고 매년 비슷하게 돌아갔다.
그런 회사는 정리해고를 하지 않았다. 고연차가 대부분이었지만, 그걸 문제 삼기보다는 그냥 그 상태에 맞춰 조직을 운영했다. 그룹 계열사 중 하나였지만, 그룹에서도 큰 관심이나 기대를 갖고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 회사에 남아 있었다면, 나는 아마 큰 풍파 없이 정년까지 일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발전하지 못한다는 지루함에 버티는 건 쉽지 않았겠지만..
정리해고라는 건 꼭 나이가 많아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된 회사라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사고를 친 회사가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투자에 실패하고,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손쉬운 선택지로 인건비를 줄이는 것. 매출이 그대로일 때, 인건비를 줄이면 곧장 영업이익이 올라가니, 경영자 입장에서는 매혹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는 그와 정반대다. 아주 젊은 회사이고, 평균 연령도 20대. 삼각형 구조의 조직이라 위는 가볍고 아래는 넓다. 성장 중인 회사라 매년 수백 명씩 사람을 뽑고, 분위기도 활기차다.
그렇다고 이 회사가 인건비를 줄이고 싶지 않은 건 아닐 거다. 다만 잘 나가는 회사이기에, 사람들이 스스로 회사를 떠난다. 그래서 ‘정리해고’ 같은 단어는 이곳에서 그다지 현실적인 이슈가 되지 않는다. 대신 이곳에도 또 다른 모습의 이탈이 존재한다.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생기는 현상. 바로 ‘밀린 사람’이다. 그들은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어린 사람이 위로 올라가고, 본인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게 된다. 평가도 점점 나빠지고, 조직 안에서 잊힌 사람이 되어간다. 일이 쉬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걸 마냥 즐기지 못한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정리해고다.
오히려 위에 사람이 적을수록 더 눈에 띈다.
밑에 있는 젊은 후배들의 차가운 시선이 더 크게 와닿는다.
정년이라는 건, 단순히 몇 살까지 일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까지 사람으로 대우받으며 일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든 회사를 똑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오래된 회사라고 무조건 낡은 것도 아니고, 젊은 회사라고 무조건 건강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남아 있는 이유’와,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회사가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다면,
모욕이 아닌 존중으로, 무시가 아닌 안내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작은 문 하나쯤은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저
‘다 같이 오래 일하는’ 회사를 꿈꾸기보다,
‘다 같이 잘 보내는’ 회사를 상상해 본다.
물론 내가 사장이라면 자르고 싶은 주변 빌런들도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