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이냐 폭망이냐
얼마 전, 슈퍼맨이 또다시 리부트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인공도 바뀌고, 이야기도 완전히 새롭게 전개된단다. 놀랍지는 않다. 요즘 영화계에서 ‘리부트’는 익숙한 전략이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007 시리즈까지. 이미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들이 새롭게 재해석되며 진부함을 벗고, 다시 흥행에 성공한 사례는 꽤 많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리부트가 오히려 원작의 명성에 금이 가게 만든 작품도 있긴 하다. 예컨대 가문의 영광 같은 영화처럼 말이다.
그럼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회사 생활에서도 ‘리부트’가 가능할까?
나는 분기에 한 번씩 팀원들과 짧은 면담을 하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늘 빠지지 않고 던지는 질문들이 있다.
1. 이전에 설정한 목표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2. 지금 하고 있는 업무 중 어려운 점은 있나요?
3. 새롭게 해보고 싶은 일은 있나요?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항상 같다.
“당신의 커리어를 위해, 다음엔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요?”
이 질문에는 대부분 명확한 답이 잘 안 돌아온다. 그래서 앞부분은 듣는 데 집중하고, 마지막 질문에는 내가 오히려 조언을 건네는 편이다.
얼마 전 지혜님과 면담에서도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혜님은 지원 업무만 계속 해왔잖아요. 혹시 생산 업무를 경험해 보는 건 어때요?"
"아, 전 공정 관련된 건 아예 모르는데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안 해본 거라 더 재밌지 않을까요? 아직은 새로운 걸 하기에 부담이 적은 시기이고 만약 가서 잘 적응하고 배운 다음에 다시 스탭 업무를 한다면 지혜님은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될 거예요. 스탭 중에 공정 아는 사람 드물잖아요."
"그래도 민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열심히만 한다면 그 부서에서도 좋아할 걸요. 신입보다 나으면 나았지 나쁠 건 없죠. 생산 업무는 결국 절차에 따라 배우는 거라 절차만 잘 숙지하면 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실제 경험하며 배우는 절차 외 적인 게 지혜님의 큰 자산이 될 거예요. 이렇게 완전히 다른 분야를 경험하는 기회는, 사실 회사 안에서만 가능한 특권이기도 해요. 지금 당장 팀을 떠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어느 방향이 좋을지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 그렇다.
만약 생산직 경력자가 연구직으로 외부 이직을 한다고 해보자. 받아주는 곳은 드물다. 하지만 사내 이동은 다르다. 어느 정도의 인맥, 타당한 이유, 그리고 내 의지가 맞물리면 가능성이 열린다.
완전히 다른 분야의 경험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그리고 이는 단지 업무의 이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도 좋은 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투자 대비 수익이 점점 줄어드는 구조다. 경지에 도달하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분야의 초급 지식을 넓게 배우는 걸 추천한다.
예컨대, 경영학 전공자가 MBA를 간다고 하자. 나쁘진 않지만, 사실 기존 지식의 연장선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공계 출신이 MBA를 한다? 그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사고방식 자체를 넓혀주는 경험이 된다.
그 자체로 나의 의지, 나의 성장 범위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파이형 인재’가 되는 것이다.
후배들에게 리부트를 권유하면서, 지금 내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더 리부트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의 꽃이라 불리는 가장 일 잘하는 40대라지만, 그 말은 곧, 이제 올라가기보다 내려갈 일만 남은 시기라는 뜻도 된다.
회사 생활은 롤러코스터 같다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올라갈 때는 천천히 올라가지만, 내려갈 때는 정신 못 차리게 빠르게 내려간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은 시점에, 조금이라도 덜 혼이 빠지려면 나도 리부트가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민철이에게 연락해 봤다. 민철이는 개발 2팀에서 일하던 동기인데, 얼마 전에 돌연 육아휴직을 내고 미국에 가서 MBA를 하고 왔다. 쌍둥이를 핑계로 3년을 내리 투자해서 MBA를 끝내고 온 게 대단해 보였다.
"민철아, 잘 지내냐? 한국 오랜만에 와서 어색하지 않아?"
"어색하긴, 여기가 편하지. 르미야, 너도 잘 지내지?"
"나야 뭐 큰 변화 없이 그대로지 뭐. 근데 나도 MBA 한번 해볼까?"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너 진짜 준비 잘하고 가는 거 아니면 난 추천 안 한다."
"왜? 그래도 너 나름 좋은데에서 MBA 하고 왔잖아. 사람들이 그러던데, 임원 코스 갈 수 있을 거라고."
"미국에서 취직을 했어야 했는데 못해서 난 망했어. MBA를 하는 목적이 하다 보니깐 알겠더라고. 공부도 공부인데 인맥 쌓는 게 더 중요하더라고. 공부만 하지 말고 사람들하고 더 친하게 지내서 미국에서 자리를 하나 찾았어야 했어."
"그래도 난 너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런 도전을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나도 그건 만족한데, 그동안 쓴 돈이랑 시간 생각하면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그래도 나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잖아."
"그렇다면 술이나 한잔 사라. 형이 요즘 고기를 먹은 지가 오래됐다."
"그래, 불쌍한 동생한테 형이 고기 한번 살게, 이번 목요일에 시간 비워놔."
꽃길을 걷는다 생각했던 녀석인데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 더 혼란스러워진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무턱대고 뭘 하기엔 이제 너무 무거워진 때라, 뭘 저지르기보단 더 심도 있게 고민해 보고 기준을 세워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리부트를 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설령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괜찮다. 아직 난 건강하고,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고, 아직은 멋있는 아저씨니까.
어쩌면 나중에,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역주행의 아이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니, 한번 시도해 보자.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