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말 테다.
평일 아침에 눈을 뜰 때면 기분이 늘 우울했다. 군대 시절 기상나팔을 들으며 벌떡 일어나야 했던 그 반사적인 고통처럼, 출근길은 내게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 우울감을 안겼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다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직장인의 숙명이랄까? 회사 가는 게 즐겁다면, 그건 회사가 아니라 돈을 내야 하는 놀이공원이나 휴양시설 일 것이다. 즐겁기만 한 곳에서 누가 월급까지 줄까?
하지만 최근에는 왠지 아침에 기분이 좋았다. 눈을 떠도 기분이 좋았고, 회사를 갈 때도 즐거웠다. 그 이유는 바로, 2주간의 휴가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게 휴가를 간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봤더니 놀랍게도 신혼여행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근속 년수가 늘면서 휴가도 점점 늘어 이제 연차가 20개 정도 되는데 매년 10개도 못 쓰고 나머지를 연차 보상받는 게 다반사였는데, 이번에 장기근속 포상으로 받은 6일짜리 휴가를 핑계로 휴가를 며칠 더 붙여 2주간 휴가를 떠나게 됐다. 휴가비라고 나온 금액에 이걸로는 집에서 놀면서 틀 에어컨비도 안 나오겠다며 헛웃음을 짓긴 했지만, 휴가 자체는 너무 좋았다.
덕분에 휴가 결재를 올릴 때도 당당했다.
"굳이 가려던 건 아닌데, 장기근속 휴가를 다녀오라고 하네요~ 이왕 나가는 거 조금 길게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능청스럽게 웃으며 휴가 계획을 밝혔고 휴가 사유에도 '장기근속 휴가'라고 적었다. 물론 난 휴가 결재를 올리며 별도로 보고하고, 사유를 쓰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팀원들에게도 늘 이렇게 말한다. "휴가는 내가 주는 게 아니라 근로계약서 상 여러분에게 주어진 권리니까 휴가를 쓰면서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사유도 굳이 자세히 쓰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 말이 위로는 통하지 않는다. 윗세대 어르신들에겐 여전히 ‘어디 감히 사유도 안 쓰고 휴가를?’이라는 분위기가 남아 있으니까. 또한 눈치도 잘 살펴야 한다. 휴가 일정을 정하면서 임원분의 휴가 날짜를 확인하고, 그분이 복귀하는 날에 맞춰 내 휴가를 시작하도록 계획했다. 자칫 눈치 없이 했다간 미운털을 박히기 십상이다.
어쨌든, 나는 휴가 결재를 받았고, 이제 잘 다녀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며칠 후 담당 임원분과 점심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임원분이 한 가지를 지시하셨다.
"르미님, OOO 동향 관련해서 보고자료 하나 준비해 줘요. 사장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네, 이번 주 목요일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그렇게 급하지 않아도 돼요. 다음 주 화요일까지 해도 됩니다."
"상무님, 다음 주에 휴가 가시는데, 화상으로 보고하시나요?"
"아뇨, 긴급한 사장단 회의에 나도 참석하라고 해서 휴가는 오늘 아침에 취소했어요."
"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고 보니 관세 때문에 긴급한 회의가 잡혔고, 주요 안건이 상무님 담당이라 예정된 휴가를 아예 취소하신 거였다. 저번에도 휴가 바로 직전에 취소하셨었는데.. 그건 그렇고 왜 하필 지금...
마음을 추스르며 평정심을 찾고 조심스럽게 여쭸다.
"사모님은 뭐라고 하세요…?"
이 질문에 임원분은 휴대폰을 보여주시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여보 빼고 우리끼리 다녀올게. 한 동안 밥 차려줄 사람도 없는데 곰국이라도 하나 해둘까?'
순간, 내 아내가 떠올랐다. 우리 집이었다면 100% 이렇게 나왔을 거다.
'비행기랑 호텔 예약해 뒀는데 그거 취소도 안돼. 그리고 여보가 안 가면 가서 운전이랑 어떻게 하라고. 회사야 가정이야? 그럴 거면 회사 당장 그만둬!'
그런 걸 보면, 역시 저 정도는 되어야 임원이 되는구나 싶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건, 회사 일이 우선순위가 되고, 개인의 삶은 그다음이 된다는 뜻이다.
요즘 젊은 팀원들이 팀장이나 임원이 되기를 꺼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난 내 삶을 살겠다. 명예나 약간의 돈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하진 않겠다.' 이게 지금 세대의 현실적인 생각이다. 예전엔 회사에서의 승진이 거의 유일한 성공 루트였지만, 요즘은 돈도, 인기와 자아실현도, 다른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시대니까.
이제는 임원이 되는 게 가성비 낮은 선택처럼 보이는 시대. 그럼 앞으로 회사는 어떻게 굴러가게 될까? 다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조직은 지속 가능할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고민하는 걸 보니 나도 늙은이 꼰대가 다 되었네. 자발적 노예 하나 추가.'
회사의 미래가 어떻든, 상무님의 기분이 어떻든, 그런 고민은 접어두고,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다.
"휴가"
지금 아니면 못 간다는 사즉생, 생즉사, 아니 사즉'휴가', 생즉'취소'의 각오로 꼭 휴가를 가겠다.
"팀장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기필코 나는 이번 휴가를 갈 것이다.
이게 내 '작고 소박한 반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