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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2주간 휴가 가면 생기는 일

다녀오면 내 자리가 없어지는거 아냐?

by 구르미
ChatGPT Image 2025년 9월 4일 오후 11_24_33.png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여행을 갔었지만, 매번 길어야 주말을 끼고 5일 정도였다. 그 마저도 내 윗분의 눈치를 보고, 업무 스케줄을 보고 고민고민을 하다가 일정을 잡고, 휴가 전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불안해하며 휴가날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휴가가 취소됐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휴가를 못 가고 비행기를 취소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보다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더 컸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휴가 한번 가는 것도 이렇게 걱정하고, 심지어 못 가게 까지 되는지.


이 회사로 옮긴 후 10년째, 10년을 기념해서 회사에선 휴가 6일과 아주 조촐한 휴가비를 줬다. 휴가비는 정말 생색내는 정도였지만, 휴가가 좋았다. 쪼개 쓸 수도 없었고 한 번에 가야만 했고, 이는 내 윗분께 모르는 척 읍소하기 적절한 핑계였다. 그래서 이참에 조금 길게 휴가를 가기로 했다. 조금 더 지나면 아이도 중학생이 됐기에 지금이 아니면 어렵겠다 생각하고 2주간의 휴가를 계획했다. 다른 거 다 고민하지 않고 무작정 비행기부터 예약했다. 브리즈번 in, 시드니 out. 그렇게 꿈꾸던 호주를 드디어 가게 됐다.


예약은 진작에 했지만, 임원분께 말하는 데에는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임원분의 심기를 살펴야 했고, 너무 일찍 말하면 잊으실지도 몰라 참고 참고 참았다. 와이프는 혹시 가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니냐며 성화였지만, 그렇게 휴가 1달 전까지 참다가, 상무님과 같이 점심을 먹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휴가 시즌이라 흔한 스몰톡으로 시작했다.


"상무님, 이번 여름에는 어디 안 가십니까?"

"안 그래도 이번에 가려고 했는데, 사장님이 작년에 가지 않았냐며 가지 말라더라고."


아...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지금 여기에서,

'아, 안타깝네요. 근데 전 다음 달에 휴가를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얜 날 놀리는 건가?'와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2주간 휴가 다녀오겠습니다는 그렇게 다시 배꼽 아래로 내려보냈다.


한주가 더 흘렀다. 점점 휴가 날짜는 다가오고, 불안감은 커져갔다. 오늘은 보직장들과 상무님의 정기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틈만 나면 휴가 가겠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다 같이 있는데에서 휴가 얘기를 꺼낼 순 없었기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 막바지에 갑자기 상무님이 올해 여름휴가는 다들 안 가나요?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다행히 몇몇 보직장이 휴가 계획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하늘이 도왔다. 만약 다들 바빠서 안 간다고 했다면... 이번에도 말을 못 할 뻔했는데.. 내 차례가 왔고,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올해 입사 10주년이어서 회사에서 6일간 휴가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겸사겸사 오랜만에 2주 정도 휴가를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더 말하기 어려워질지 모른단 불안감이 용기를 내게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용기를 내야 할 일인가도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회사원, 특히 보직장은 칼날 위 파리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렇게 통보를 하고, 재빨리 결재를 올리고 2주간 업무를 어떻게 할지 대체자를 찾았다. 오지에 가는 게 아니기에 중요한 결재 경로에서 날 빼진 않았고, 현지에서 승인하기로 했다. 노린 건 아니었지만 호주는 한국과 시차가 1시간이기에 밤에 자다가 깨서 승인하는 불상사는 없을 터였다.


중요한 업무는 다행히 상무님이 대체자를 지정하라고 해서 내용을 알려주고, 자료를 넘겨주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2주 내에는 다 끝내겠지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잘해주겠지?


2주간 자리를 비운다는 건, 여행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보직장에겐 불안한 일이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만약 내 공백으로 일이 멈춘다면? 그럼 날 찾겠지? 난 비행기로 10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럼 내가 책임감이 없다고 할 테고, 내 신용도는 떨어질 테고, 여행지에서 내가 대응을 잘 못한다면 혹시 내 자리가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얼토당토 한 생각에 여행 전날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다가 깬 와이프는 내 속도 모르고, "여행이 떨려서 잠이 안 오나 봐?"라고 물었다.


차마 회사 일이 걱정돼서 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렇게 공항으로 향했고, 비행기를 탔고, 모든 통신은 끊겼다. 잘들 하겠지? 지금 쯤 무슨 회의를 할 시간이네?라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화이트 와인 몇 잔을 마시고 잠들었다. 두 번의 식사 후 드디어 여행지에 도착했다.


처음엔 일이 잘 돌아갈까 걱정하다가, 나중엔 호주의 자연과 도시에 동화되어 그냥 거기 사람이 되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행지와 동기화였다. 맑은 공기, 시원한 날씨, 푸르른 자연, 활기찬 사람들. 그렇게 하루 같이 빠르게 2주가 지났고, 걱정했던 회사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전화도 오지 않았다.


토요일 도착 후 일요일에 출근할까도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하루 종일 뻗어버렸고, 월요일 아침 오랜만에 출근을 해보니 회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굴러가고 있었다. 마치 평범한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것처럼, 자리도,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그토록 불안해했는데,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가 너무 회사에 얽매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날 너무 크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막상 난 언제 사라져도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인데. 아이의, 와이프의 여행지에서 웃음을 보면, 내 존재는 내 가족에게서 더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동안 난 너무 회사 내에서 내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2주간의 휴가 이후에 느낀 것은, 난 막상 그렇게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렇게 회사에 얽매였었지만, 그건 그냥 짝사랑이었다. 회사만 바라보던 날 보며 내 가족도 나에게 짝사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집에 와서도 회사일을 했고, 몸은 집에 있지만 회사에서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계속 등에이고 지고 있었던 몸뚱이만 집에 있던 아빠, 그리고 남편. 괜히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서, 나도 가족을 바라보고 사랑해 줬다면 서글픈 짝사랑 말고 따뜻한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회사만 생각했나.


그런 자책을 하며, 괜스레 달력을 들춰본다. 다음 여행은 언제 어디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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