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배우는 성선설과 성악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모르면 적고, 적지 못하겠으면 녹음이라도 해. 왜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지? 당신은 받아쓰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생각을 좀 해봐."
오늘도 보고는 5분 만에 끝났다. 밤을 새워 글을 쓰고 표를 넣고 그림을 그려 20페이지를 썼지만, 두 장도 넘기지 못했다. 몇 번째 다시 해오라는 챗바퀴인지 모르겠다. 메모를 보고, 머릿속에서 장면을 재생해 봐도 도대체 원하는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다. 정말 관심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자괴감과 함께 ‘그냥 못하겠습니다’ 하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포기했다간 지금 내 자리를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마음을 붙잡고, 실무자와 함께 건물 주변을 돌며 자료의 방향을 잡아본다. 확실히 이렇게 처참하게 깨졌을 땐, 좁은 회의실보다 걷는 게 낫다. 걸으면 분노나 자책이 조금은 발걸음에, 바람에 흩어진다.
“많이 힘들죠? 저도 같이 한 건데, 태훈님만 욕먹은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답이 없긴 한데… 어떻게든 생각하시는 걸 캐치해서 자료를 만들어 봐야죠. 우리 이렇게 해봅시다.”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 나 자신도 답이 안 보이면 자괴감이 몰려온다. 자료 작성의 주체는 태훈이었지만, 그중 70%는 내가 만든 것이었다. 결국 이번 보고의 실패는 내 실패이기도 하다. 이럴 때면 ‘리더’라는 단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내 상사는 왜 매번 화가 나 있을까? 저분은 원래부터 화가 많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회사가 저분을 화가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조금만 더 친절하게, 조금만 더 상세하게 생각을 말해준다면 나도 더 자료를 잘 만들고 시간도 줄일 수 있을 텐데..
사실 부하직원을 긴장하게 만들고, 다그치는 것이 단기적인 결과 측면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다.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일상인 내 상사의 경우에는 짧은 시간 안에 여기저기 자료를 받고 정리하고 보고해야 했기에 저런 화가 일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집에선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집에서도 저런다면 내가 부인이라면 당장 이혼하자고 하고, 자식이라면 대화를 끊을 것 같은데 아직도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퇴근과 함께 변신을 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대단하다.
난 사실 화를 잘 내지 못한다. 초년생 때에 화를 낼 이유도 없고, 단순히 윗사람의 말을 잘 듣고 배우고 업무를 하면 됐다. 하지만 연차가 올라가고 관리해야 하는 업무와 인원이 늘어날수록 '화를 내야만 하는' 상황이 늘어났다.
예를 들면, 일하지 않는 부하직원이 있다면, 따끔하게 화를 내야 한다. 그 화를 낼 때는 절대로 두리뭉실하게 내면 안되고 건수를 잡아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즉, 늦은 출근을 뭐라 하는 것보다, 업무에서 소홀한 부분을 말해야 한다.
"소정님, OOO 검토는 빠지면 안 된다고 항상 얘기드렸는데, 이 자료에는 그 검토가 빠져있네요. 이번에는 제가 다시 봤으니 다행이니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어요. 다음부터는 누락되지 않도록 하세요. 또 반복되면 그때는 평가에 영향이 있을 겁니다."
이런 정도의 톤으로는 말해야지, 내 성격대로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소정님, OOO 검토가 빠졌네요. 제가 정리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음부터는 잘 챙겨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잘하는 친구들이야 잘 이해하겠지만 일부러 일을 대충 하는 친구들은 '아, 적당히 하다 걸렸는데도 별말 안 하네. 다음에도 대충 해야지.' 하고 얕잡아 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런 궁금증도 든다. 저 부하직원은 원래 게으른 사람이라 계속 그런가, 원래 성실했는데 내가 관리하지 못해서 게을러 진건가.
회사는 학교가 아니고, 동호회도 아니다. 꼭 착하게 보여야 할 필요가 없다. 비록 다른 부하직원이 내가 내 상사를 생각하는 것처럼 악하게 보더라도, 성과를 위해선 가끔 악해져야 할 때도 있어야 한다.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회사에선 악한 사람이 필요하다.
한창 태훈이와 머리를 맞대고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옆자리 지훈이 퇴근 인사를 한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더 악해져야지..
당신의 상사는, 그리고 당신의 부하직원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당신은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