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작가가 꿈이었던 적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글은 항상 내 곁에 있었지만, 내가 바라던 글은 매번 정상을 오르지 못한 높은 산처럼 저 멀리 있었다. 언제쯤 저 정상에 올라 '휴, 이제 다 왔네'라고 할 수 있을까?
국민학생 때, 과학의 달(4월), 가족의 달(5월), 호국의 달(6월)이면 의례 글짓기 대회가 있었고, 선생님의 말을 무척이나 잘 들었던 나는 매번 글을 써서 냈었다. 다들 노느라 바빴는지 반 대표로 출품이 되었고, 큰 상은 못 받았지만 참가상과 비슷한 장려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걸 참 좋아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글이었는데 어머니는 재밌게 읽어주셨다. 어떻게 바꿔야 한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그런 표현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빨간펜을 들고 메모를 잔뜩 달아놨을 텐데, 그 기다림이 새삼 고맙다.
고등학생 때, 난 뛰어놀기보다는 교실에서 앉아있는 걸 좋아했다. 땀이 잘 안식기도 했고, 얼굴에 땀이 많이 나서 그 상태로 수업을 듣는 것도 불편했다. 당시에는 에어컨은 상상도 못 할 꿈같은 존재였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내 유전자가 원래 그랬나 보다. 왜냐면 지금 내 아들도 그렇게 나가 놀라고 해도 친구들과 1시간, 길어야 2시간 놀고는 자기 혼자 먼저 집으로 돌아오니까. 당시에는 질감을 참 좋아했다. 특히 학습지('블랙박스'로 기억한다)의 표지였던 '스노우 화이트'지의 촉감이 좋았다. 거기에 파일럿 0.3mm 펜으로 글을 쓰면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오히려 안에 문제는 다 안 풀었는데 매월 학습지의 뒷장은 빼곡히 글을 썼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감성이 충만해서인지 시를 그렇게 많이 썼었다. 참 유치했지만 영화 연출가가 꿈이라던 내 짝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고, 크게 잘 썼다, 못썼다 평은 없었지만 항상 귀찮더라도 읽어줬던 게 좋았다. 아마 그 친구에게는 탐탁치 않은 부탁이었을 수도 있지만 응해줬던게 고맙다. 물론 그 대신 그 친구 공부를 많이 도와주긴 했다. 그때 쓴 글들은 다 사라져서 흑역사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군대에서는 참 시간이 안 갔다. 특히 야간 경계 근무는 더욱 그랬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됐지만 지휘관 분들이 순찰을 잘 돌지 않는 시간대에는 꼭 수첩을 들고나갔었다. 그리고는 작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글을 썼다. 봤던 영화의 소감을 쓰거나 읽었던 책에 대해서 쓰거나 되지도 않는 설정의 소설을 쓰거나 아버지, 어머니, 동생,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곤 정성 들여 다이어리에 옮겨 적거나 편지지에 옮겨 적었다. 그땐 참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그게 또 즐거웠던 것 같다. 참 부단히 도 많은 글을 썼었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을 골라 사단 콘테스트에 출품했고 운 좋게 당선해서 '국방일보'에 내 글이 실렸다. 지금 보면 풋내 나는 글이었는데 그 글로 받은 포상 휴가 때 집에 가보니 아버지께서 잘 읽었다고 참 좋아하셨다. 그때 그 신문 글도, 그때 썼던 수첩도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따뜻한 기억이었던 게 좋다. 물론 지금 보면 참 오글거리는 글들이겠지만, 첫사랑의 추억처럼 굳이 다시 들춰보진 않아도 될 것 같다.
회사에 오고 나서는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여유가 없다기보다 다른 것에 밀려 그럴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8년여 첫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 회사로 이직하면서 경력사원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약간은 흔한 활동인 단체 연극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분장을 하고 연기를 하기가 귀찮기도 했지만, 뭔가 내면의 끌림에 따라 연출을 담당하기로 했다. 다른 팀들은 다들 우수광스러운 분장을 하고 재미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난 과감히 진지하게 가기로 했다. 그나마 최근에 봤었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기본으로 해서 회사 교육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고, 뮤지컬을 봤을 때 가장 감명 깊었던 'Murder! Murder!' 장면을 회사에서 좋아하는 단어로 변경해서 노래와 춤까지 준비했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태블릿으로 각 장면의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대사를 추가하고, 각 배우들에게 이를 설명했다. 녹화가 아니라 연극이었기 때문에 일정 부분은 자율적으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공연이 시작됐고, 배우들과 조명, 무대 스텝들 모두 인이어로 내 마이크에 귀를 기울였다.
"5초 후 시작합니다. 5, 4, 3, 2, 1, 주인공 등장, 음악 큐, 조명 온"
그때의 떨림이 아직도 기억난다. 보안상 녹화를 못했던 게 참 아쉽지만 배우 포함 스탭 모두 잘해줘서 (내 기억상으론) 압도적으로 1등을 했다. 지도 선배들도 정말 잘 만들었다며 칭찬을 해줬고, 이런 맛에 대학로에서 다들 떠나지 못하고 있는구나 하는 간접 체험을 했다. 물론 좋긴 했지만 현실과 타협하고 더 나아가진 못했다. 어쩔 수 없는 패러디물이었고, 온전한 이야기를 만들기엔 내 머리는 그렇게 참신하지 않았으니까.
40 춘기에 접어들면서 신체나 정신적 변화보다 사회적 변화가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커가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긴장감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현재 회사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50 넘어서 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란 고민은 뭐라도 해야겠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임원 진급 소식은 날 더 조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뭘 해야 내 경쟁력을 올릴 수 있지란 걱정 콤보는 내게 휴식은 사치라고 말했고, 여행 가자는 와이프의 말은 내가 한가로이 여행을 가도 되는가? 란 불편함으로 다가왔고, 아이의 '아빠, 회사 잘 갔다 와'란 말조차 내가 일을 더 잘해야 한다는 채근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점점 난 작아졌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눈높이를 낮춘 커리어를 위한 이직이 실패한 후, 한마디로 난 '길을 잃었다.'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그러다 예전에 들었던 김영하 작가의 '해방의 글쓰기' 강연이 생각나 당시 메모를 열어봤다. 강연 중 들리는 대로 메모하고, 다시 정리를 하지 않아 내용이 뒤죽박죽이지만 이 내용이 눈에 띄었다.
'쓰면 분명해진다. 쓴다는 것의 힘.
일시적인 감정으로 쓴 글이 영구적을 말하지 않는다. 말과 글의 힘의 차이. 두렵다.
그러나 쓰는 건 필요하다. 뭔가를 쓰지 않는 사람은 나를 알지 못하게 된다.'
다시 정리해서 쓸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게 더 좋았다. 뭔가를 쓰지 않는 사람은 나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 말이 참 좋았다. 지금 내 상황과 내 걱정을 적어봤다. 적어보니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엄청나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조직도 이끌고 있고, 최근 평가도 나쁘지 않게 받았고, 회사도 아직 잘 나가고 있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 문제는 내 불안이었다. 5년 후 10년 후가 불안하여 계속 날 채근하고 있었다. 미지의 목표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자꾸 나에게 무언갈 해내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 지금을 집중해 살기로 했다.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의 순간을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고맙게도 항상 내 글을 읽어줬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나에게 글을 써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