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이 무조건 좋을까?
며칠 전 갤럭시 S25가 출시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폰을 고를 때 이왕하는 거 제일 좋은 모델을 고르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특히 대기 고객인 사전 예약 때에는 그 비율이 더 높다. 아마도 이번에도 울트라가 제일 많이 팔리겠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비자는 기본 모델일 제일 많이 선택한다. 제조사는 기술을 집약한 하이엔드 혹은 플래그쉽 모델과 원가를 절감한 로우엔드 혹은 엔트리 모델을 내놓긴 하지만 결국 주력, 메인스트림은 그 사이에 위치한다. 제일 싼 건 뭔가 부족할 것 같고 제일 비싼 건 과할 것 같아 손실회피 심리로 보통 기본으로 고르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플래그쉽을 선택하는 것 처럼 선구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실제 판매량도 기본 모델이 제일 많이 팔린다.
그럼 이런 표준 마케팅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이 설명을 위해선 적극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던 서구사회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과거 귀족사회, 계급사회에서는 상품의 등급 선택이랄 게 없었다. 귀족은 고급품을 썼고 하층민은 저급품을 썼지만 이건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무한 공급의 시대도 아니어서 여러 등급을 만들 상황도 아니었다. 그냥 주는 대로 썼고, 불만이 있었다면 직접 만들어서 쓰면 됐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포드를 위시한 컨베이라인 대랑생산 체계로 사람들의 부는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세계 2차 세계대전 이후 무한대에 가까운 군수물자를 생산하며 미국의 생산력과 그에 따른 이익은 극에 달했다. 전쟁 특수 이후 기업들은 어떻게 불어난 공급만큼의 소비를 이뤄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제 그들의 고객은 전쟁국가가 아닌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로 전환됐다.
프랑스 귀족사회였다면 이는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장인들은 귀족을 위해 비싼 제품을 만들었고, 노동자의 봉급이 늘었다고 해도 노동자가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분업 생산 체계를 구축하며 제품 가격을 낮추는 동시에 엄청난 양의 제품을 찍어냈다. 이제 노동자들이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게 문제였다. 이때 등장하는 게 광고와 잡지, 그리고 백화점이었다.
20세기 초 대부분의 미국 가정은 라디오를 보유하고 있었고, 라디오 광고에서는 사회적으로 중산층이라는 계층의 이상을 적극 활용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일어난 경제적 변화는 중산층의 경제적 여력을 확대시켰고, 마케팅은 이들을 소비의 주체로 정의하며 소비 패턴을 구조화했다. '이제 당신들은 당신들의 부모님처럼 노예나 빈민층이 아닙니다. 당신은 중산층입니다. 중산층이라면 이 정도는 보유하고 계셔야죠.' 참으로 저속하지만, 예전에는 돈으로 구매하지 못했던 계급을 이젠 돈으로 살 수 있다란 건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한 예로, 헨리 포드의 모델 T 자동차는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슬로건으로 대량생산과 합리적 가격을 강조해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했고 포드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페라리, 포르쉐 등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와 견줄 수 있는 회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포드 vs 페라리' 영화를 본 후 포드가 단순히 장사꾼이라는 생각은 조금 누그러졌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만들어낸 백화점이라는 혁신적인 공간은 그 현상을 더 가속시켰다. 1858년에 뉴욕에 설립된 메이시스(Macy’s)는 초기 백화점의 대표적 사례로, 다양한 상품을 한 곳에서 구매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하며 소비를 촉진했다. 백화점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소를 넘어, 중산층을 겨냥한 화려한 쇼핑 환경을 조성해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노동자들은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게 당연한 모습이 되었다.
거기에 잡지에 실려있는 유명인들의 생활에 대한 기사는 나도 그들과 동일한 제품을 쓰면 그들처럼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허영심까지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여성의 노동 참여'와 '할부'개념의 등장도 이런 무한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국 요점은, 미국은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적극 광고하고, '중산층이라면 이 정도는'이라는 무언의 가이드를 주었다. '아메리칸 스탠더드'란 회사명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뉘앙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 아메리칸 스탠더드는 1892년 설립된 아메리칸 라디에이터 주식회사와 1875년 설립된 스탠더드 위생용품 제조회사가 합병되어 만들어졌다.)
하지만, 요즘은 표준 마케팅이라는 게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로 이제 더 이상 공급자 우선 시장경제가 아니다. 공급은 이미 수요를 넘어섰고, 예전처럼 공급자가 신상품 혹은 기술이 트렌드를 바뀌지 못한다. 반면에 디지털 기술 발전과 데이터 기반 소비자 분석, 플랫폼 경제의 부상 등으로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에 첨단 기술 보다 고객이 무엇을 좋아할지를 판단하는 게 큰 성공 요인이 되었다. 그렇게, 예전에 가능했던 메뉴판 마케팅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맞춤형 메뉴판이 대세가 되었다.
이는 회사의 가치를 보여주는 시가총액 순위의 변경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2013년의 시가총액 상위 기업을 보면, 엑손모빌(ExxonMobil), 쉐브론(Chevron) 등 에너지 기업들이 강세를 보였으며, 애플(App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등 기술 기업도 포함은 되어 있었지만 순위가 높진 않았다. 하지만 2023년의 시가총액 상위 기업을 보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Amazon), 알파벳(구글 모회사), 테슬라, 엔비디아 등 기술 및 플랫폼 중심 기업이 상위권에 자리 잡았다. 요즘 세상은 고객 맞춤형 플랫폼 기업과 AI 기업이 중심이 된 것이다. 에너지 회사는 이제 더 이상 상상 이상의 미래 가치를 만들어 내기 어려워졌고, AI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갖고 있고, 아마존은 기존엔 상상하지 못했던 물류 혁신을 보여주고 있다.
평일에 휴가를 내고 롯데월드를 가본 적이 있었는데, 다들 회색 통이 넓은 츄리닝 바지에 노스페이스 검은색 눕시를 입은걸 보고 예전 학창 시절 생각이 났다. 그때도 힙합바지에 노스 패딩이 유행이었는데, 학생들은 아직도 다들 비슷하게 입고 다니는구나 하며 피식 웃었었다. 저 아이들도 조금 더 크면 남들과는 다르게 입겠다며 신기한 패션을 선보이고, 엄마 아빠에게 등짝을 맞겠지.
나도 모르게 Risk를 줄이려고 '기본으로 주세요'라는 게 익숙하지 않았나 싶다. '기본'을 선택하면 평균은 간다, 실패는 안한다는 믿음은 있지만, 요즘 세상이 수렵 사회처럼 Risk에 도전했을 때 죽을 수도 있는 사회도 아니니 나도 이젠 '기본'보다는 '내 맞춤'형 선택을 해야할 것 같다. '기본'대로 가다가 남들처럼 50 즈음에 은퇴하고 퇴물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지금에서 살아남기 위해 늙어서도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이 내 맞춤형 선택일지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