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공덕, 공덕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평일 오후 2시인데 환승역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내리고 탔다. 그럼에도 서있는 사람보다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아 지하철은 한산했다. 뭔가 옷이 어색해서 누가 날 신기하게 쳐다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들 뭔 재밌는 기사가 있는지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무료 신문에만 정신이 빠져 있었다. 어차피 집에 가져가도 버릴 꽃다발이었는데, 미리 학교 화장실에 버리고 오길 잘했다. 그걸 들고 있었다면 분명 누군가 쳐다봤을 테니까.
오늘은 2년간 다녔던 대학교의 졸업식이었다. 정규 대학도 아닌 평생교육원이었는데도 굳이 졸업식을 하는 게 영 탐탁지 않았지만 2년 동안 들인 돈이 아깝기도 했고, 잠시나마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시켜 줬던 게 고마워서 참석했다.
귀하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바이올린 전공, 서은영
교수님께서 졸업장과 꽃다발을 주시는데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2년 동안 숱하게 택시비를 내가며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큰돈을 들여 교수님께 레슨도 받았지만 내 실력은 음악 학원을 다니는 미취학 아동 수준이었다. 기초 교본에나 나올 학교종 정도 칠 수 있는 그런 수준. 그럼에도 난 여느 같은 반 학생들처럼 썰렁한 강당에서 졸업 연주회를 했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드레스를 입고 바이올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수준급의 편집가 덕분에 내 팔뚝살은 날아가고 허리라인은 잘록해졌고, 쇄골뼈는 우물을 만들었다. 저게 내가 맞나? 2년 동안 2천만원 넘게 들여서 내가 맞는지 아닌지 모를 사진과 졸업장을 얻었다. 그게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나도 내가 왜 뜬금없이 바이올린을 전공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취업에 도움이 될 전공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돈으로 유럽에 가서 몇 달을 살아도 됐다. 근데 바이올린을 선택한 건 아마 나에게 지워진, 내가 나를 돌보지 못했던 5년을 보상받고 싶었었나 보다. 마치 바비 인형에 예쁜 옷을 입혀 주듯이. 나에게 미안했던 내가 주는 예쁜 선물 인 듯이.
꽃다발과 함께 졸업장까지 버리지 못한 건, 이것마저 없으면 그 2년 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였나 보다. 그렇게 패잔병의 전리품처럼 무릎 위에 놓인 쇼핑백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집에 가면 얼른 이 조이는 옷을 벗고 죠스떡볶이나 시켜 먹어야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옆자리에서 영어가 들려왔다.
"Excuse me? Can I seat here?"
"Of course, Sure!"
"Thank you so much. Where are you from?"
"I am from NY"
"..."
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검은 피부의 남자 옆자리에 앉으려던 젊은 남자가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 막힘없는 발음. 나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부럽다.'
괜히 대충 사는 내가 미안해질 만큼. 저 용기가 부러웠고, 자신 있는 영어 실력이 부러웠고, 젊은 게 부러웠다.
그렇게 몇 정거장 후 이태원에서 그 흑인은 내렸고, 내가 내려야 할 역에 가까워질 때 뜬금없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일부터 뭐 하지?'
이제 학교도 끝났고, 막상 내일부터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날 채근하고 싶어졌다.
'저 사람한테 영어를 배워보면 어떨까?'
순간 어이가 없어 실소가 삐져 나왔다. 평소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인데, 나도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졸업식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룬 게 아무것도 없이 곧 29살 생일이 되는 게 아녔다면 아마 이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내려야 할 역은 지나갔다.
몇 정거장이 더 지났는지 모르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 남자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일어났다. 고구마 냄새에 끌려가는 강아지 마냥 그 남자를 따라 내렸다. 한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삐~이이이이~"
문은 닫혔다. 조금 있으면 계단. 계속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 남자는 다행히 몰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멈췄다. 순간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말할까, 말까..
오히려 이 사람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용기를 내기에 충분한 동기가 있으니까.
근데 저 사람은 고작 30분 전에 본 사람이고, 5분 전에 생각난 어이없는 내 결심으로 영어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1초를 100으로 나눈 것처럼 할까 말까를 반복반복반복 하다가 난 손을 들어 그 사람 어깨를 쳤다. 이게 아니면 뻔하디 뻔한 기운 없는 은영이로 돌아갈게 뻔했으니까.
"저기요"
"네?"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닌데요. 혹시 제 영어 과외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아.. 내가 왜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말했지. 진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잖아..
다시 용기를 내서,
"아까 영어 하시는 거 봤는데 잘하셔서요. 저 오늘 졸업했거든요. 거짓말 아니고 여기 졸업장도 있어요. 근데 최종 졸업하려면 영어 점수가 필요해서요."
와.. 서은영, 완전 사기꾼. 나도 내 뻥에 놀랐다. 음대에 무슨, 그것도 평생 교육원 졸업하는데 무슨 영어 점수가 필요하겠니. 뻥을 쳐도 좀 제대로 쳐야지..
"아 네, 근데 저도 영어 잘 못하는데.."
"그래도 저보다는 훨씬 잘하시던데요. 기초부터 배우고 싶어서 그래요.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 전화번호 드릴 테니까 한번 생각해 보고 연락 주세요."
졸업장이 담겨있던 종이봉투의 덮개 부분을 잘라 전화번호를 적어서 줬다. 과연 저 남자는 나에게 연락을 할까? 아니, 그것 보다 저 남자는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도를 믿습니까?'라던지, 사기꾼이라던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저 남자는 바쁜 듯,
"네, 한번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라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갈 길을 갔다.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난 그 자리에서 발을 뗄 수 없었고, 그가 시야에서 멀어진 후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뭘 한 거지?, 바보, 내가 왜 그랬지? 으이그, 누가 어리바리 서은영 아니랄까 봐..
그렇게 다시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아, 쪽팔려. 근데 내가 웬일이냐, 이런 걸 다 하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