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by 구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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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농담 식으로 물어나 봐야지.


"그럼 이제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아 네, 그렇게 하세요. 전 은영님이라고 부를게요."

"선생님,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아, 딱히 약속 없어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저 오늘 친구들이랑 약속 있는데 남자를 꼭 한 명 데리고 가야 해서.. 진짜 죄송한데, 가서 가볍게 인사만 하고 가주시면 안돼요? 제가 대신 한번 수업한 걸로 하고 수업일수 하루 빼드릴게요."

"음........ 잠깐만요.."


은영아... 이게 또 뭔 막말이니.. 수업 시작도 못하고 과외 끝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이 밀려왔다.


"네, 잠깐 들르죠 뭐. 그게 언제예요?"

"아, 마침 지금 바로 출발하면 돼요 ㅋㅋ 선생님 데리고 간다고 할 테니 가볍게 인사만 해주고 가셔도 돼요. 안 그러면 제가 다 사는 걸로 돼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뭔가 민폐의 연속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재밌다. 지하철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더 했는데, 동철쌤은 작년 가을에 제대해서 복학하기 전까지 알바를 하고 있다고 하고, 올 가을학기면 복학한다고 하더라. 일 년 동안 바짝 일해서 남은 등록금을 벌거라고 하는 말에 경외감이 들었다.


30분 후 종로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피맛골에서 만나기로 했고, 아직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인사동 거리를 슬쩍 걷고 술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시간 맞춰 도착했고, 역시나 관심은 선생님에게 쏟아졌다.


"야, 이성진, 나 남자 데려왔다. 그러니까 1차 네가 사는 거야. 돈도 잘 버는 놈이 사야지 안 그래?"

"그래 그래, 알았어. 근데 이분은 누구야?"

"아, 내 과외 선생님. 선생님, 이제 가셔도 돼요.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아, 가긴 어딜 가요. 왔는데 같이 밥은 먹고 가요~"


역시나 넉살 좋은 민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난 그냥 가줬으면 했다. 어차피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왔다.


"아, 마침 배가 고파서 그럼 1차만 같이 하고 갈게요!"


헐,, 이 사람 뭐지? 넉살이 좋은 건지, 진짜 배가 고팠는지, 아님 내가 맘에 들었나? 에이, 아니다. 그럴 리 없지. 한창 파릇파릇한 쌤이 그럴 리가.


그렇게 친구들과 오랜만에 수다를 떨다 중간중간 젊은 친구들은 어떤지 세대차이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1차가 끝났다. 그리고 2차를 가려는데 또 민수가 주접을 떨었다.


"동철 씨, 여기 바로 옆에 노래방에서 맥주 한잔만 하고 가시죠?"


몇 잔 안 마셨지만 동철쌤은 볼이 빨개져 있었다. 다행히 말이 잘 맞아 그래도 재밌게 얘기했던 터라 내심 기대도 되었다. 좀 더 놀아도 좋겠단 기대.


"네, 딱 한잔만 더 하죠. 어차피 아직 9시라 집에 가기도 조금 애매한 시간이라서요."


그렇게 어이없게도 (제대로) 처음 만난 쌤과 노래방까지 갔다. 다들 뭘 부를지 고르고 있는데 대뜸 쌤이 노래를 찍었다.


'서른 즈음에'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술자리에서 내 나이는 밝혀졌고, 우리는 동철쌤이라기 보단 어린 동생처럼 재밌게 놀았는데, 여기서 '서른 즈음에'?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잊혀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서른이 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꿈 많던 20대 초반, 갑작스럽게 아빠가 돌아가시고 평생 아빠만 바라보던 엄마마저 갑자기 당뇨병 합병증으로 병원으로 가셨다. 당뇨병은 엄마의 온 몸을 고생시켰다. 내 위에 오빠가 둘, 언니가 하나 있었지만 그나마 가장 가까운 작은 오빠랑 나랑 나이차이가 4살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지만 그놈은 아직도 철이 안 들어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알 수가 없다. 다들 결혼하고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엄마의 간호는 내가 하게 됐다. 불평할 틈도 없었다. 엄마까지 잃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병원에서 먹고 자고, 환자가 아님에도 난 환자처럼 5년을 보냈다. 기적처럼 엄마는 병원 생활을 끝냈지만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난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었지만, 나에겐 엄마라는 딸이 생겼다.


당뇨병은 완치됐지만 완치가 아니었다. 신경써야 할 것도 너무 많아서, 학교도 엄마 때문에 빠지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난 뭐 하나 이룬 게 없이 서른이 되었다. 내가 날 잃었던 그 시절을 살고 있는 남자의 노래를 들으며 서른이라는 나이를 깨달았다.


난 날 희생했다고, 난 내 젊음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고 투정해 봤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젊음은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형체 없이 바닥에 흘러내려 있었고, 난 내 젊음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그 청구서를 받았다. 지불하고 나니 내 나이는 벌써 서른이 되었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반품하고 싶지만 받아주지 않는다. 젠장.


아,, 이제 진짜 서른이구나.

난 뭘 했지? 난 서른에 맞는 사람일까?

난 실패한 서른이 아닐까?


친구들은 야유를 보내며 이 노래는 서른이 돼야만 부를 수 있다고 소리 질렀지만 쌤은 꿋꿋이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이어서 분위기를 띄운다며 친구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했지만, 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써보지도 못한 젊음에 대한 청구서가 너무 슬펐다. 괜히 못 마시는 술만 연거푸 마셨다.


친구들은 3차를 가자고 했지만, 난 피곤하다며 먼저 나왔다. 쌤도 이젠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같이 종로역까지 가면서 굳이 이렇게 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같이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쌤은 웃으며 저도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한다며, 한동안 일한다고 친구들도 못 만났었다고. 불러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행이다. 이상한 사람,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아서.


그렇게 짧은 인사를 하고 쌤이 지하철 타러 가는 걸 봤고, 난 지하철 역을 나와 택시를 탔다.


'어차피 청구서 내야 할 거, 이런 거라도 써야지.'


뒷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바람은 아직 찼지만 술기운이 올라 더웠기에 왠지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이 모든 게 23살에 꾸는 꿈인 것 같아서.


집으로 가던 중 12시가 넘었고 문자가 하나 왔다.


'서은영 고객님, 생일을 축하합니다.'


아, 그러네. 오늘이 내 생일이네.

머릿속에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가듯 화면이 지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딸,

우리 딸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아빠는 너무 기쁘단다.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

은영이는 아주 큰 꽃봉오리를 갖고 있는데,

그게 너무 커서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것뿐이야.

은영이가 그 꽃을 피울 때까지 아빠는 은영이 곁에서 항상 응원할게.

아빠는 은영이가 세상이 놀랄 예쁜 꽃이 될 거라 믿어.'


아빠의 마지막 생일 축하 카드 문구가 생각났다.

아빠가 생각날 때마다 읽어서 이젠 글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꽃은 아직 피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꽃봉오리가 시들어 떨어질 것 같다.


이젠 누가 이렇게 생일 편지를 써주지.

갑자기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아빠.. 왜 내 생일인데 축하 안 해줘..

아빠..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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