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업

by 구르미

과외는 집에서 하니까 오랜만에 집 청소도 하고, 책상도 정리했다. 사실상 짐 놓는 곳이었던 책상이 오랜만에 비워졌다. 그 남자 얼굴은 명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이란 기억만 남아있었다. 이따가 지하철 출구에서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황이 웃기긴 하다. 마침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성진이한테 전화가 왔다.


"으녕아, 너 이따가 올 거지? 니 생일 기념이니까 네가 쏘는 거지?"

"안돼, 나 영어 과외 시작해서 돈이 없어."

"뭐, 네가 과외를 해? 너 영어 못하잖아?"

"내가 과외 선생을 하는 게 아니라! 영어 과외를 받는다고!"

"네가? 왜? 너네 오빠 사는 텍사스 가게?"

"아니, 그냥 배워보고 싶었어."

"야, 근데 누구한테 배우냐? 어르신을 위한 과외도 있냐?"

"뒤질래? 네가 겁을 상실했구나?"

"알았어, 괜히 화내긴 ㅋㅋ 나 오늘 내 여자친구 데리고 가도 되지?"

"그거야 네 맘이지 왜 나한테 물어보냐? 너 혹시 독거노인 눈치 보는 거냐? 나도 남자 데려갈 거야!!"

"얼,, 누구? 네가 웬일이냐? 구라 치면 네가 다 내는 거다."

"됐고, 나 영어 공부해야 해, 끊어!"

"그래, 네가 공부한다니깐 이상하긴 한데, 이따 보자, 늦지 마~"


성진이까지 짝이 생기면 혼자인 건 나 밖에 없네. 괜한 허세로 엉겁결에 1차를 쏘게 돼서 속이 쓰리다. 그나마 싼 감자탕 집에서 보자고 해야겠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벨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약속시간...'


지금 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부랴부랴 겉옷을 입고 스니커즈를 대충 구겨 신고 역으로 뛰어갔다.


"아, 혹시 과외 선생님...? 안녕하세요. 미안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아, 저도 방금 왔어요."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실까요?"

"아, 교재를 선정해야 해서요. 제가 근처 서점 찾아봤는데, 역 근처 글벗서점으로 가시죠."

"아, 거기 저도 알아요. 거기로 가시죠."


아주 짧은 대화인데도 뭔가 전문적으로 보였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골랐나 보다. 왠지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점에 가서 몇 개의 책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난 모른다는 걸 표현했다. 그렇게 영어로만 된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책을 선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책은 미국 초등학생 교재였다. 고등학교 때도 영어를 제대로 안 했고 그 이후 10년이 지났으니, 초등학생이 딱 맞는 수준이긴 하겠다.


책을 계산하고 그 남자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 봐 먼저 드려요. 그리고 과외는 선불이라고 해서 오늘 꼭 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네, 감사합니다. 이상하게 시작하긴 했지만 저도 열심히 해볼게요."

"근데 오늘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죠? 저기 새로 생긴 카페 있는데, 거기에서 커피 한잔하고 내일부터 시작하면 어때요?"

"아 네, 그렇게 하시죠. 대신 커피는 제가 살게요!"


자주 가던 카페에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음료가 나올 때까지 어색하게 있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다.


"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과외하기로 결정하셨어요?

"그때 과외 해달라고 하시는데 뭐랄까 진심인 것 같았어요. 군대 가기 전에도 과외를 했었어서, 어차피 지금 일하는 곳과 가깝기도 해서 해보기로 했어요."

"아, 다행이에요. 그리고 감사해요. 아 제 이름을 말 안 했네요. 전 은영이예요. 서은영."

"아 전 동철이예요. 이동철. 작년에 제대했고 올해 23살이에요. 혹시 몇 살이에요?"

"아, 그건 비밀이에요 ㅋㅋ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아 네, 그럼 내일부터 수업 시작할 테니 첫 챕터는 먼저 읽어봐 주세요. 초등학생 교재라 어렵지 않을거에요."


헐, 나보다 7살이나 어리다니.. 내가 그렇게 늙은 거야? 갑자기 내가 더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젊네. 부럽다. 밖은 이제 어두워졌고, 이제 카페에서 자리를 일어서려고 하는데, 문득 그 생각이 났다.


'나도 남자 데리고 갈 거야.'

이전 02화안녕하세요. 김미영 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