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아, 저녁에 아빠가 케이크 사갈게

by 구르미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늦잠을 자고 있는데 아빠가 출근하며 내 방문을 살짝 노크하며,


"예쁜 우리 딸, 저녁에 아빠가 케이크 사 올 테니 같이 파티 하자~"


난 잠결에 "응~" 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달라붙어서 "여봉 오늘 일찍 와요~" 하며 애교를 떤다.

다 늙어서도 그렇게 좋을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고 늦잠을 잤다.


방학이라 느지막이 일어나서 엄마가 차려놓은 아침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고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가 점심 겸 저녁으로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이따가 아빠가 오면 맛있는 거 먹어야지 하면서. 그때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서기철 씨 댁이죠? 여기 한국병원인데요. 지금 서기철 씨가 쓰러져서 응급실로 오셨습니다. 보호자께서는 지금 바로 한국병원 응급실로 와주세요."

"네? 뭐라고요? 서기철이면 우리 아빤데, 아빠가 쓰러졌어요? 얼마나 다치셨어요?"

"아, 자세한 건 오셔야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얼른 오세요."


엄마는 무슨 일인지 놀라서 날 쳐다봤고, 이미 정신이 나간 엄마를 부축하고 얼른 택시를 타고 한국병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큰오빠에게도 전화해서 상황을 말하고 다른 오빠랑 언니한테도 연락해서 한국병원으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아빠 별일 없을 거야. 아빠 건강하잖아. 아마 가벼운 교통사고 같은 걸 거야."


일부러 말을 건넸지만 엄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응급실에서 아빠 이름을 찾으니 한쪽을 가리켰고, 의사 한 명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심장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에피네프린 더 주세요."

"서기철 씨 보호자 되세요? 가족들 다 오셨나요?"

"아, 지금 오고 있어요."

"네, 다 오면 알려주세요."


아빠는 아무런 상처 없이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심장 마사지를 할 때마다 머리까지 흔들렸지만, 눈을 뜨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오빠와 작은오빠, 큰언니, 그리고 학교에서 동생이 도착했다.

의사에게 가족이 모두 왔다고 전하자,


"지금 서기철 님께서는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이송되셨고, 약 한 시간 동안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지만, 아직 맥박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보호자분께서 동의하시면 심폐소생술을 중단하겠습니다."


온몸이 땀에 젖은 그 의사에게 ‘조금만 더 해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큰 오빠가 이제 그만하셔도 된다고 말하자,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멈췄고, 시계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기철 님, 2003년 12월 24일 23시 17분, 사망하셨습니다."


그날이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아빠 한번 안아줄걸. 아니 잘 다녀오라고, 이따가 보자고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 줄걸..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던 아빠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 줄은 아침엔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믿기 힘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아빠는 사무장 아저씨와 저녁 약속 중 속이 불편하다며 잠시 밖에 나갔고, 화장실에서 쓰러지셨다. 한동안 오지 않던 아빠가 이상해 사무장 아저씨가 화장실에 가봤을 때는 이미 골든 타임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구급차에 실려 여기까지 오셨겠지.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떠난 아빠.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다면, 아빠가 나갈 때 같이 나갔다면, 아니, 그날 아침에 내가 오늘은 그냥 회사 가지 말라고 했다면.. 수없이 시간을 돌려서 무엇이 잘못 됐을까 곱씹어 봤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빠는 변호사셨다.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수재소리를 들었고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바로 시작하셨다. 엄마는 아빠가 가난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아빠는 법복을 입기 싫어서 검사를 안 한다고 했다고 했다.


아빠는 돈은 참 많이 버셨지만, 버는 만큼 시간도 없었던 것 같다. 매일 늦게 퇴근하셨고, 주말에도 고객을 만나야 한다며 약속이 잦았다. 그래도 어쩌다 쉬는 날이면 항상 아빠가 열심히 놀아 줬었다. 해외여행은 못 갔지만, 그래도 놀이공원도 가고 야구장도 가고, 아빠는 항상 웃으며 언니 오빠랑 나랑 민수와 함께 했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버셨는데, 웃기게도 지금 우리집은 돈이 없다. 엄마랑 나랑 동생이 사는 26평 빌라 한 채가 전부다. 아빠랑 같이 일하던 사무장 아저씨는 장례식 때 이제 나만 믿으라고 했지만, 이미 예전부터 치밀하게 아빠가 벌었던 자산을 아무도 모르게 자기 자산으로 돌려놓았다. 아빠가 그렇게 믿었던 사람인데 우리 가족은 그렇게 아빠의 피땀을 잃었다. 큰 오빠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며 아빠의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소란을 피웠지만, 다른 변호사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상황을 파악했지만, 우리가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바보 같은 아빠, 결국 아빠는 너무 순진했다. 아빠가 평생을 노력해 모은 것들은 내가 누리지도 못하고 받은 젊음의 청구서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우리 가족에게, 나에게, 일 년 중 가장 슬픈 날이 되었고, 아빠의 빈자리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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